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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15. 2020

'액체 괴물' 통 그리고 꽃

예기치 못한 만남, 어둠 속에 빛을 들이는 일

작은 꽃집의 단골이 되었다. 이번 주에는 무슨 꽃을 살까. 앙증맞은 하얀 꽃송이 여러 개가 올망졸망 모여 있는 꽃이 눈길을 끌어 이름을 물었다. 코와니라고 한다. 나폴리 부추라고도 부르는 코와니는 꽃말처럼 순수하고 천진해 보였다. 코와니 몇 송이를 모아 부케처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머물고 있는 단출한 공간에는 한두 송이가 적당하다. 결국 코와니의 짝으로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거베라 한 송이를 골라 조심스럽게 데려왔다. 작은 꽃집에 들러 꽃을 한두 송이 골라 데려오는 새로운 일상과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약국에서 필요한 약을 사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무심히 걷다 문득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작은 다육이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물고 있는 좁은 공간이 너무 삭막하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한참 들여다보다 겨우 골라 데리고 나오려는데, 꽃집 청년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 장미 향이 너무 좋아요. 한 송이 드리고 싶은데.” 

“아… 근데 꽃병이 없어요." 

그는 음료수 병 같은 데 꽂으면 된다며 활짝 핀 하얀 장미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장미는 그의 말대로 그동안 만났던 어떤 장미보다 향이 진했다. 


꽃을 받아 들고 돌아온 날 집안을 뒤졌지만 꽃병으로 쓸 만한 병은 없었다. 한참 뒤 구석에서 하얀 플라스틱 병 하나를 발견했다. 그 병을 보는 순간 악몽이 떠올라 잠시 인상을 썼지만, 병은 꽃을 꽂아두기에 맞춤했다. 몇 달 전 건강검진을 위해 잠시 며칠 머물렀을 때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그때 ‘액괴(액체 괴물)’라고도 불리는 하제 복용을 위해 썼던 병이다. ‘표시선까지 채우고 복용하세요’라는 무시무시한 문장과 250ml, 500ml 라고 눈금이 그어진 투박한 병은 꽃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였지만, 꽃을 꽂아 두니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아름다움의 절정은 대개 고통 뒤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대장내시경 하제 복용을 위해 병원에서 보내준 일회용 플라스틱 통과 꽃. 예상했던 대로 일상이 흘렀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두 존재가 예기치 못한 상황 안에서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기치 못한 만남과 연결이 일어날 때 그곳에 ‘번쩍' 하며 빛이 들어온다. 



어둠 속에 빛을 들이는 일이 누군가에게 내미는 꽃 한 송이 같은 것이면 족하다니.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막막함을 느끼는 요즘, 이런 작은 일이라면 계속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보면 볼수록 플라스틱 꽃병과 하얀 꽃이 잘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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