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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Dec 04. 2022

나는 여전히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작은 씨앗이다

<랩 걸>_호프 자런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걸 시작하는 걸 좋아했지만, 똑같은 걸 반복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게 지루함이었다. 오죽하면 (기억하는) 최초의 거짓말이 피아노 숙제할 때 한 번 치고 다섯 번 쳤다고 바를 정 자(正)를 쓴 거였을까.  


그런 내가 10년 넘게 글을 쓰면서 180도 바뀌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나 열매 없이 똑같은 일을 무한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화려하고 찬란한 순간보다 그 뒤에 매일 반복되는 루틴의 소중함을 이제는 잘 안다. 


우리나라가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에 오르게 한 황희찬 선수의 골. 그 골처럼 찬란한 순간을 볼 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긴 침묵의 시간에 오히려 주목하게 된 것이다. 운이 따라 주지 않거나 성취하지 못해 실망하는 시간, 때로는 부당한 비난이나 조롱을 받기도 하는 시간, 그럼에도 묵묵히 매일매일의 연습을 이어가며 기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 그 오랜 기다림에 눈길이 가고 박수를 보내게 된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
매년 지구의 땅 위에 떨어진 수백만 개의 씨앗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만이 싹을 틔운다. 
그중에서 또 5퍼센트만이 1년을 버틴다."

-호프 자런 <랩 걸> 중


나무에서 눈에 띄고 환영받는 건 꽃이나 열매뿐이지만, 실은 거기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대부분의 시간 하는 일은 기다림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절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것. 긴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티도 안 나는 매일의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것. 


영감이 찾아오든 안 오든, 좋은 글을 쓸 수 있든 쓰지 못하든 매일 새벽 일정한 시간에 책상에 앉는다.  (솔직히 '영감'님은 거의 찾아오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 좋은 글은 나오지 않는다.) 그날의 할 일 목록과 감사 제목들을 매일 적는다.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을 먹인 후 함께 묵상을 하고,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 나간다. 주말도, 휴일도, 방학도 똑같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여행길 위에서도 , 밤늦게 월드컵 경기를 보았어도, 몸이 좀 아파도...


이제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사를 가면 아이들 학교가 바로 집에서 길 건너다.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할 때에 비해 매일 두 시간 정도는 절약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가정 예배 때문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아이들이 조금 늦게 일어나도 되냐고 물었고, 우리는 함께 며칠을 고민했다. 어제 아침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기상 시간과 가정 예배 시간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했다. 베이징에서 지난 9년 동안 매일 쌓아 올린 루틴을 흔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언제나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린다는 걸 잘 아니까.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호프 자런 <랩 걸> 중


이 책의 저자도 씨앗이 나무가 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리며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열매도 없고 빛도 안 나는 긴 시간을 끌어안고 기다리며, 필요할 때는 물과 햇빛을 향해 적극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과학자가 되었다. 단순히 나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나무가 되어 나무의 지혜를 온몸으로 살아냈기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감동이 더 크다.


이제 곧 한 해가 또 가고 몸은 늙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작은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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