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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14. 2023

마음만 적시려던 안일한 마음 때문에 마음은 젖지 못했던

귀찮지만 신나는 일

빗소리가 들린다. 가만가만히 모두 적신다.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용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빗물에 내 몸이 젖거나 흙탕물을 밟아 신발이 젖는 일은 없다. 마음만 푹 젖어든다. 마음 따위는 얼마든지 젖어도 그만이다.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빗소리를 듣고 싶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빗물이 들이쳐 커튼을 적시고 마루나 방바닥에 물이 고였다. 조금은 귀찮은 일이었다. 창문을 닫고 유튜브로 들어갔다. 더욱 실감 나는 빗소리를 소리 크기까지 조절해 가며 들을 수 있었다. 취향에 맞게 빗소리의 종류를 고르는 건 덤이었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 비가 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원한다면 밀림에서 내리는 빗소리나 깊은 바닷속에서 꼴꼴 거리는 물방울 소리와 고래들이 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일은 이제 쓸모없는 일이다. 낡고 추루한 것.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건 그렇게 손 때 묻고 바랜 것들이라는 걸 뭔가를 정리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새것은 오히려 버리기 쉽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추억을 쌓아온 물건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손쉽게 들을 수 있는 빗소리를 끄고 창가로 간다. 다음 빗소리를 기다린다.


마침내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에는 문을 활짝 열었다. 언젠가 이 날을 위해 장만해 두고는 신어 본 적 없는 장화를 꺼내 신었다. 마음만 적시려던 안일한 마음 때문에 마음만은 젖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분홍색 장화를 신고 찰방찰방 물을 튀기며 빗속을 걸었다. 들고 있던 우산을 잠시 치우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몹시 귀찮은 일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입꼬리가 슬금슬금 자꾸 위로 기어올라갔다. 시원하다. 젖고 있는 건 머리카락이나 옷이 아니라 바싹 말라 먼지가 풀풀 날리던 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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