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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형, 사고형? 아니 몸이 먼저!

신체저능아가 살아남는 방법

by 윤소희

"너 MBTI, T라더니 실은 F지?"

"아무리 봐도 F 같은데...F지?"


상대방은 점점 더 아니라고 부인하다 화를 버럭 낸다. 얼마 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다. 아직도 사고형(T)이 감정형(F) 보다 낫다는, 이성이 감정 우위에 있다는 케케묵은 철학이 유머 포인트라니...


들뢰즈가 철학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스피노자 이전에 신체는 그저 정신을 가두고 영혼이 죄짓도록 만드는 굴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정신이 형성하는 관념은 오직 우리 신체가 경험하는 것들과 그 폭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며 신체의 지위를 재정립했다. 쇼펜하우어는 무의식을 관통하는 개념으로서의 '의지'를 말하며 신체를 '표상의 형식을 취한 의지 자체'라고 표현했고, 니체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이라고 표현해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신분석이 발달하며 감정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던 이성의 지위가 끌어내려졌다. 최근 잇달아 나온 뇌과학 연구들을 보면 '몸이 먼저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결정한다' 등 어쩌면 이성보다 우위에 있을지 모르는 감정과 신체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컨설팅 회사에 다닐 때 입사하자마자 받은 트레이닝에서 MBTI를 대인관계에 활용하는 훈련을 받은 적 있다. 나와 동료, 직장 상사,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MBTI를 분석해 대화나 설득을 더 효율적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회사 내에서도 실질적인 분석을 담당하는 컨설턴트 레벨에서는 'T'가 훨씬 많았지만, 주요 결정을 담당하는 파트너 레벨에 올라가면 'F'가 더 많고 유리하다고 했다. 과학적 연구 결과를 보지 않아도 이미 경험적, 통계적으로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뭔가를 인식할 때 데이터나 감각(S) 보다 직관(N)을 더 많이 쓴다고 해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때 감정(F)을 사고(T) 보다 더 활용한다고 해서 우월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뭔가를 인식하는 단계에서든 그걸 바탕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단계에서든 우리는 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내 몸이 얼마나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상태에 있는지, 내 몸이 어떤 동작들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내 인식과 판단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감정이 우위냐 사고가 우위냐를 따지기 전에 몸이 먼저라는 얘기다.


이미 십여 년 전에 한 번 포기했던 골프를 최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레슨 몇 번 받으면 웬만큼 칠 수 있는 이들도 많던데, 나는 레슨을 받으면 받을수록 퇴보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레슨 때는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손가락이 멋대로 힘을 주어 오히려 스윙을 방해하고 있던 것이다. 기분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조그만 공 하나 제대로 칠 수 없는 모자란 인간이 되었다. 내 존재 자체가 발바닥에 밟힌 듯 납작해졌다. 그 기분은 운동신경과 전혀 관계없는 내 본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자기 효능감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기혐오에 빠졌을 때,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질 때, 무엇을 해도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을 때 … 그 어떤 것보다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뒤 깊은 잠을 청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법… (니체)

자기혐오, 우울,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열쇠도 결국 몸이다.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을 보여주는 개 실험은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어떻게 해도 전기충격을 피할 수 없던 상황에 일정 기간 놓여 있던 개들은 나중에 가벼운 장애물만 넘어가면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재배치되어도 꼼짝 않고 전기충격을 그냥 견딘다. 이렇게 정신적 외상을 입은 개들을 치료하는 열쇠도 결국은 몸이었다. 개들을 억지로 우리 밖으로 계속 끌어내어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몸으로 직접 경험하게 하자, 무력했던 개들이 무기력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의 문제를 몸을 달래 해결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몸을 따뜻하게 하면 폭발할 것 같던 팽팽한 긴장감도 눈 녹듯 사라진다. 물리적 온도뿐 아니라 심리적 온도도 뇌의 섬엽이라는 영역에서 동시에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별 등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낄 때 진통제를 먹으면 가라앉기도 한다. 마음이 아픈 것과 몸이 아픈 것을 느끼는 부위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체육 시간에 전원이 다 넘을 때까지 뜀틀 넘기를 반복시켰던 선생님이 결국 포기했던 학생. 전교에서 유일하게 뜀틀을 넘지 못했던 신체 저능아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몸이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며 잘 돌보고, 꾀를 부려 슬쩍 속이기도 하면서 잘 달래야 하는 게 아닐까. 잠도 푹 자고 맛있는 것도 충분히 먹었고 옷도 따뜻하게 입었으니, 한 번만 잘 쳐볼까? 내 몸이 둔하긴 해도 생각보다 똑똑해서 잘 속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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