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대신 한계만 보이는 눈
저울이 균형을 잃었다. 왼쪽 접시에는 하고 싶은 것들이 오른쪽 접시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놓여 있었는데, 오른쪽 접시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처음에는 균형점을 찾기 위해 기우뚱하던 저울이 이제는 아예 무력하게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나이 때문에 더 이상 밝은 톤의 헤어 컬러를 할 수 없다는 반복된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시커메졌다. 언젠가 스케치북에 그려놓은 그림 위에 검정 크레파스를 들고 북북 덧칠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러 사정으로 온 가족이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스케치북은 금세 아이의 불안과 분노로 새까매졌다.
젊은 날 머리카락을 새카맣게 물들인 적이 있었다. 지우고 싶은 게 있을 때 덧칠하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 지우려던 건 가난과 수치, 그리고 원가족이었다.
이제 덧칠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노화된 내 몸과 마음을 덮어 가려야 한다는 걸 배우는 중이다.
왼손 엄지에 염증이 생긴 지 이제 두 달이 되어 간다. 밥이나 국을 퍼담을 때, 예전처럼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그릇을 가볍게 들어 올리지 못한다. 힘없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그릇을 끼워 아슬아슬하게 들어 올린다.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도, 손톱깎기로 손톱을 깎는 것도 이제 다른 손가락들의 몫이다. 마치 엄지는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엄지를 쓸 수 있던 날의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다.
40세 넘으면 생일 축하하는 거 아니야.
어머니가 누워 계시니 여행 가는 거 아니야.
소설을 쓰는 동안은 에세이 쓰는 거 아니야.
메리제인 슈즈에 양말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실력이 늘지도 않는 밴드는 이제 그만.
...
할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믿는 것들의 목록이 끝없이 늘어가는 게 아닐까.
늙는다는 것의 본질은 몸의 노화가 아닐지 모른다. 젊은 눈에 가능성으로 보이던 것들이 점점 한계로 보이는 것일 뿐.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왼쪽 접시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덜어내거나, 오른쪽 접시에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찾아 올려놓거나.
전자를 생각하면 속상하고, 후자를 떠올리면 아직은 막막하다
(야한 생각을 많이 하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