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TV, 라디오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들뜬 아나운서의 음성이 지겨울 정도로 흘러나왔다. 새해 다짐들에 대한 사연과 달라지는 여러 가지 법률에 관한 상세한 설명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봐도 똑같다. 다들 난리군. 이제 곧 40살이 되는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 모든 상황을 최대한 시니컬한 자세로 쓴 표정을 지으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곤 이내 그녀는 침대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다. 라디오는 켜 둔 채. 라디오에서는 새해맞이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았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그냥 대로 잠시 있다 그녀도 모르게 잠이 든다.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는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침대 옆에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아, 이대로 이렇게 있을 순 없어. 그러나 달리 무슨 수가 있지? 그냥 이렇게 시간이 가고 늙다가 죽는 거야. 그게 다 인가? 그게 다지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을 뿐이야. 각종 인생이 달라졌다는 책들? 그걸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지? 인생의 버킷리스트? 인생 계획표? 도전하라! 이런 책들에 현혹되기라도 한 거야? 이대로 내 인생을 끝낼 순 없어.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데..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무의미하게 지내다가 삶을 마감하긴 너무 싫어. 어떻게 해야 되지? 그렇다고 자기 계발서처럼 의욕이 활활 타오르거나 하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야. 언제나 난 그래 중간이 좋고 뜨뜻미지근해.’ 그녀는 이런 도돌이표 같은 문답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생각의 소용돌이가 치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것이다. 다시 들끊었던 생각이 조용해진다.‘인간은 살다가 다들 죽잖아?’ 허무감이 밀려온다. 대체 나라는 인간은 뭘 바라는 걸까? 도통 알 수가 없다. 또 한해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슬퍼하고 또 그간 삶에 자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띠링~’ 문자가 왔다. 새해 첫날부터 무슨 문자일까? 아마 또 새해 인사 문자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승주 씨 후배 이지윤이라고 합니다. 뵙고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김승주 씨는 같이 운동하는 모임에 있는 사람이다. 5년 전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서 가입한 모임이었다. 해가 흘러 흘러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운동도 많이 했고 건강도 좋아졌다. 김승주 씨도 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모임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만나서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 김승주 씨의 후배가 나에게 무슨 일로 연락이 온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오늘 마침 아무 일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놀라셨죠?”
“네, 조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는 승주 오빠를 좋아해요. 아주 많이요.”
승주 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녀는 참 싱그러워 보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녀의 젊음도 푸르러 보였고 사랑하는 모습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승주 씨는 좋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좋아하고...”
“그렇지도 않아요. 승주 오빠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오빠한테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언니 아니 박채린 씨요.”
“저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럴 리가요. 잘 못 아신 것 아닌가요?”
“맞아요. 승주 오빠는 박채린 씨를 좋아해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승주 씨는 나보다 6살이나 어리다. 그런 남자가 나를 좋다고 하면 이 시점에서 나는 좋아해야 하는 것인가? 그보다 왜 나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옆에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말이다. 나에게 아직 여자로서 매력이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을 품고 있던 찰나였다.
“그래서 말인데 승주 오빠 포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승주 오빠가 저에게 오게 좀 도와주세요. 부탁드려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지윤 씨, 그만 울어요 이쁜 얼굴 다 망가져요.”
“저 진짜 승주 오빠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오빠는 그냥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저를 여자로 봐주질 않아요. 그전부터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어요. 겨우 누군지 알아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이게 저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아무 성과 없이 끝나게 되었잖아요. 이젠 전 어떡해요?”
“승주 씨가 그렇게 좋아요? 왜 좋아요?”
“그냥 좋아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누군가를 저렇게 원 없이 좋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생각하는 것도 많아졌고 무턱대고 사랑에 덤비지 않는다. 사실 나에게 다시 사랑이 올지도 의문스럽다. 나 가슴은 메마를 때로 메말라 풀잎조차 자라나지 않는다.
“지윤 씨,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누구도 자기를 잃을 만큼 가치 있는 존재는 없어요. 승주 씨도 좋아하는 것보다 지윤 씨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세요.”
“승주 오빠랑 비슷한 말 하시네요. 전에 오빠가 저한테 그런 말 한적 있어요. 그래서 승주 오빠가 채린 씨를 좋아하나 봐요. 처음에는 나이도 많은 여자를 왜 좋아하나 했는데 오늘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승주 오빠가 채린 씨를 좋아하는 이유를요.”
지윤 씨와 헤어지고 난 후에 집에서 생각에 빠졌다. 사랑! 이 감정은 이젠 나에겐 다신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많이 아파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더군다나 40살! 이 나이에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감정이라 여겼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옛날이었으면 가슴 떨리고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왜?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그렇게 젊고 예쁜 여자를 두고 말이다. 김승주! 5년 전 운동모임에서 만났다. 평소 운동을 좋아해서인지 다부진 몸을 가진 청년이었다. 모임에 성실하게 나왔고 나도 열심히 참여해서 같이 모임장도 하고 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이성적으로 다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도 나이 차이도 있고 해서 그런 감정으로 대한 적은 없다. 사고가 건전하고 대화가 통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지난해 모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간 적이 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나를 언제부터 좋아한 것인지 나를 왜 좋아하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직 이성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감정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그날 그에게 연락이 왔고 다음날 보기로 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지윤이가 좀 철이 없어서 그랬을 것에요. 전부 제 불찰입니다.”
“지윤 씨가 승주 씨 많이 좋아하던데요.”
“네, 알고는 있었어요. 제가 입장 정리는 더 명확히 했어야 했는데. 본의 아니게 여지를 준 것이 되었네요.”
“지윤 씨가 맘에 안 드세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어제 들으셔겠지만 전 박채린 씨를 좋아합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는 잘 이해가 안 가요. 저는 나이도 많고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저에게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채린 씨 충분히 매력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죠. 부족한 저를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저는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승주 씨 좋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은 늘 해 왔죠.”
“그럼 저와 진지하게 만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겠어요? 지금 당장 대답 안 해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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