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지 않는 다정함

‘선한 영향력’이 불편해질 때, 임상춘 작가를 떠올린다.

by 윤슬

드라마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 〈폭싹 속았수다〉를 쓴 임상춘 작가를 저는 좋아합니다. 그 작품들에는 흔히 드라마에서 “팔리는” 장치가 없습니다. 재벌가의 아들이 등장하지도 않고, 과장된 악인이 모든 판을 뒤집지도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조금 찌질하고, 조금 억울하고, 조금 유치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정이 가는—그런 인물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흐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임상춘 작가 인터뷰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802466.html


“드라마를 쓰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게 철칙.”


이 한 줄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좋은 메시지”를 넣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판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훈계


요즘은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일종의 면허처럼 쓰일 때가 있습니다. “이게 정의야.” “이게 옳음이야.” 그 말이 시작되는 순간,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은 쉽게 무지하거나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종종 관객을 “교육 대상”으로 대하곤 합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자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닫힙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 속에는 종종 이런 전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아직 모르지?

내가 알려줄게.

네가 틀렸고 내가 맞아.


누군가 나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볼 때, 사람 마음속에는 반발심이 먼저 올라옵니다. 속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옵니다.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저도 그렇습니다. 설령 상대가 ‘좋은 일’을 말하더라도,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나를 교정하려 들면, 대화는 끝이 나버립니다. 사람은 원래 완벽하지 않습니다. “옳은 삶”을 말하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밤에 야식을 먹고, 도덕을 말하면서도 뒤로는 이기적이 될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타인을 재단하는 말은 날이 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선전’의 문법


생각이 더 멀리 가면 무서운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을 가르치고 비난하는 글이 쌓이고, 거기에 “옳음”이라는 명분이 붙고, 반대편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그건 어느 순간 독재국가의 선전 도구와 닮아갑니다.


“좋은 일”이라도, 그걸 할지 말지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순간, 그것은 선함이 아니라 강요가 됩니다. 그 강요는 종종 ‘사랑’과 ‘정의’라는 포장지를 두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디즈니의 ‘PC 논쟁’을 보며 든 생각


이 감정은 최근 대중문화 논쟁과도 연결됩니다. 흔히 말하는 디즈니의 PC주의(정치적 올바름) 논란이 그렇습니다. 다양성과 대표성을 확대하려는 시도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소외되었던 인종과 성별을 전면에 세우고,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필요한 변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관객이 종종 느끼는 건 “다양성”이 아니라 훈계입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편견을 버려.” “너의 시선은 낡았어.”


이 메시지가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들면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야기보다 메시지가 먼저 보이고, 캐릭터보다 선언문이 앞서 나옵니다. 그러면 관객은 재미보다 먼저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낍니다.


저는 이 지점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주제의식은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 주제의식이 작가의 목소리로 관객을 몰아세우는 방식이 되면, 작품은 설득이 아니라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설교는 대부분의 사람을 떠나게 합니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 때,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


얼마 전 어떤 인터뷰를 보다가 마음이 불편해진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선의로 “세금 절세 방법”을 알려주자, 그 작가가 “그런 것 하지 말라고 글을 쓴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저는 그 문장이 주는 느낌이 불편했습니다.)


절세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인가요?

세금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단죄해도 되나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소중한 자산을 지키려는 평범한 시민들이 모두 그 작가의 펜 끝에서는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었을까요? 자신의 가치관만이 절대적 정의라고 믿으며, 타인의 실무적인 삶을 비루하게 여기는 태도. 그것은 문학적 자존심이 아니라 독선에 가깝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저는 다시 “가르치려는 태도”의 무서움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내가 판단하고, 그 행위를 비난하고, 내 말이 정답이라고 선포하는 순간—글은 칼이 됩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찌르기도 합니다.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죠. 그 말은 멋있지만, 저는 그 말이 가끔 무섭습니다. 강하다는 건, 그만큼 사람을 움직일 힘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완용의 ‘경고문’이 알려주는 것: 문장 하나가 사람을 끌고 간다


저는 친일 인사 이완용이 3·1운동을 반대하며 신문에 실었던 경고문들을 떠올립니다.


이완용의 제1차 경고문 (현대어 정리)


1. 도입: 현재의 소요 사태에 대한 규정

최근 조선 팔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 사태(3.1 운동)를 지켜보니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이번 사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리분별이 없는 어린아이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이 남의 말에 솔깃하여 함부로 날뛰는 '망동'이 대부분이다. 이는 실로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는 길이다.


2. 독립의 불가능성과 국제 정세

지금 사람들이 '독립'을 외치고 있는데, 냉정하게 국제 정세를 보라. 강화회의(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니 뭐니 하는 말들이 나오니 곧 독립이 될 것처럼 떠드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진 나라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우리처럼 이미 일본과 하나가 된 나라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공상일 뿐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믿고 소동을 피우는 것은 무지함의 소치다.


3. 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비난과 훈계

너희는 지금 독립을 외치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폭력적인 소동은 일본 정부의 강경한 대응만을 불러올 뿐이다. 결국 너희가 입는 피해는 누가 보상해 주겠는가? 선동가들은 뒤로 숨고, 죄 없는 백성들만 피를 흘리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인가?


4. 본업 복귀와 순응 강조

지금 당장 헛된 꿈에서 깨어나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가라. 농부는 밭을 갈고, 상인은 장사를 하며, 학생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본분이다. 일본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살면서 실력을 쌓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만약 계속해서 이 망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끝에는 오직 파멸과 후회만이 있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이번 소요 사태의 행동을 보면, 지각없는 아이들과 무지한 백성들이 남의 말에 따라 생각 없이 행동하는 불상사가 많으니... 이는 실로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는 짓이다.


이 내용을 ‘3·1운동’이라는 맥락을 떼고, 그냥 어떤 사회적 시위를 향한 글로만 읽으면—놀랍게도 꽤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너를 위해 말하는 거야”라는 포장이 붙는 순간, 그 문장은 사람을 흔듭니다. 공포를 자극하고, 책임을 돌리고,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결국은 저항을 포기하게 만드는 문법으로 흘러갑니다.


그게 제가 말하고 싶은 지점입니다. 가르치려 드는 글은, 방향만 바뀌면 선전이 됩니다. 옳음을 외치는 문장이 언제든 “사람을 조용히 시키는 문장”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연설로 군중을 휩쓸고 재앙을 불러온 역사도 결국 같은 이야기 아닐까요. 사람의 생각은, 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타고 다니는 생각은 때때로 끔찍한 일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저는 ‘다정한 원칙’을 붙잡고 싶습니다.


저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가끔 무섭습니다. 과도한 PC주의가 무섭기도 합니다.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그것이 “너는 이렇게 해야 해”라는 톤으로 변할 때—그 순간부터는 세상을 더 좋아지게 하기보다 더 갈라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누가 저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낍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글을 쓰는 사람—말을 하는 사람은 신중해야 합니다.


임상춘 작가의 원칙이 그래서 좋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내 말이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고. 메시지가 있어도, 관객의 숨통을 조이지 않고. 결국 사람을 판결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일.


그 다정함은 약함이 아니라, 저는 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교정하려는 말보다, 이해하려는 말이 더 필요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건 정답이 아니라, 대개는 사람의 사정이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옳은 말”보다 “살아 있는 이야기”를 더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기 전에, 먼저 제 안의 오만함을 의심해보려 합니다.


비난하지 말 것.

가르치려 들지 말 것.


그 원칙이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예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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