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해서 더 어려운 마음의 거리들
애매해서 더 어려운, 인트라넷의 경조사 게시판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업무보다 더 정답을 모르겠는 순간이 있습니다. 보고서 형식이나 회의에서의 발언 순서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끝내 감으로만 넘기기 어려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경조사입니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 PC를 켜고 인트라넷에 접속합니다. 커피 한 모금을 머금기도 전에 오른쪽 하단에 작은 팝업창 하나가 떠오릅니다. 누군가의 결혼 소식, 혹은 누군가의 부친상. 그 찰나의 순간, 축하와 위로보다 머릿속이 먼저 복잡해집니다.
'이분하고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언제였지?', '지난번 내 경조사 때 오셨던가?', '직접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공지사항으로 본 건데, 그래도 챙겨야 하나?'
이상하게도 경조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숫자로 환산하게 만듭니다. 같은 부서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는 분과는 당연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부서 선배는 또 어떨까요. 가끔 업무로만 마주쳤던 타 부서 직원은 어디쯤에 두어야 할까요. 심지어 같은 상을 치르더라도 부친상인지, 모친상인지, 조부모상인지, 빙부상인지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도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애도의 무게를 비교할 수는 없는데도, 현실의 관행은 자꾸만 서열과 기준을 묻습니다.
누구도 대놓고 설명해주지 않지만, 모두가 눈치로만 알아서 해내고 있는 것 같은 영역. 그것이 바로 회사 경조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그 눈치 속에서 혼자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마음보다 '기준'을 먼저 찾게 되는 순간
사실 많은 직장인이 궁금해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얼마를 해야 무난할까." "어디까지 가야 예의일까." "안 가면 서운해할까."
그 질문들은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무례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기쁜 날과 슬픈 날에 너무 가볍게 보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내 형편을 무시한 채 무리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이란 늘 그 중간 지점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과하지도 않게. 내 진심은 지키면서도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선을 찾는 일 말입니다.
직장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경조사 챙기기'라는 행위의 동기는 순수한 축하나 애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 의리이고, 때로 눈치이며, 때로는 미래를 위한 보험이기도 합니다. 유려하게 흐르던 일상의 감정선이 '경조사비'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는 순간, 우리는 사회라는 정글의 민낯을 마주하게 됩니다.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의 고찰 —
심리적 거리를 경제적 금액으로 환산한다는 것
문제는 이 '심리적 거리'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드라마 속 인물 관계도처럼 우리 주변의 동료들도 저마다의 거리에 서 있습니다. 매일 점심을 같이 먹으며 상사 험담을 나누는 전우 같은 부서원이 있는가 하면, 메신저로 업무 협조 요청만 주고받는 서먹한 타 부서 직원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안 가면 5, 가면 10'이라는 공식이 불문율처럼 통용됐습니다. 하지만 가파르게 치솟는 물가와 훌쩍 오른 식대 앞에서 이 공식은 점점 무력해집니다. 이제 결혼식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는 축하객인 동시에 '식권'이라는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이 된 듯한 묘한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연차가 쌓였으니 이제 후배들에게는 조금 더 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어느 순간부터 어깨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상부상조의 미덕이라지만, 10년 전의 5만 원과 지금의 5만 원은 그 무게가 천양지차입니다. 정답이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오늘도 옆자리 동료에게 슬쩍 묻습니다.
"너 이번에 김 대리네 결혼식 갈 거야? 얼마 할 거야?"
이 눈치 싸움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팍팍한 월급쟁이 생활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정성의 온도차 —
모바일 청첩장이 던지는 화두
'적당한 선'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서 혼란은 더 깊어집니다.
어떤 분은 청첩장을 문자로 보내십니다. 어떤 분은 전화를 주십니다. 또 어떤 분은 직접 자리까지 찾아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십니다. 결혼식 후에 답례품을 돌리는 분도 계시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장례를 치른 뒤 감사의 뜻으로 기프티콘을 보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절차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경조사인데도 방식은 천차만별이고, 그래서 받는 사람의 해석도 제각각입니다.
요즘은 예의를 갖춰 종이 청첩장을 전달하는 이보다 카카오톡으로 링크 하나를 툭 던지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단체 채팅방에 뿌려지는 모바일 청첩장을 보고 있으면, 축하해 달라는 초대인지 입금을 독촉하는 고지서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반면 직접 찾아와 쑥스러운 듯 건네는 청첩장 한 장에는 그간의 세월과 고마움이 담겨 있습니다. 카카오톡 링크 하나와 종이 한 장의 차이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닌 것은,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전하려는 노력'의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받는 입장에서는 그 온도 차이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온도가 다음번 경조사에서 내 지갑을 얼마나 기꺼이 열게 할지를 조용히 결정하기도 합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쿠키 한 상자, 혹은 진심이 담긴 문자 한 통.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는 아니지만, 그 작은 정성이 관계를 다음 챕터로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니 경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정성의 크기가 아니라 정성의 유무인지도 모릅니다.
축하와 위로 사이에 숨어 있는 생활비의 얼굴
회사원에게 경조사는 감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혼 시즌이 되면 한 달에 두세 건씩 청첩장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건 한 건만 보면 감당할 만해 보이지만, 결혼식이 겹치고 부고가 이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월급은 늘 정해져 있는데, 사람의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니까요. 축하해야 할 일 앞에서 먼저 지갑 사정을 떠올리게 되는 자신이 야속할 때도 있습니다. 애도를 전해야 할 소식 앞에서 교통편과 주말 일정을 먼저 계산하는 마음이 못내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마음이 꼭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을 겨우 균형 잡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세를 내야 하고, 아이 학원비를 챙겨야 하고, 부모님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고, 내 한 달의 예산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또 청첩장이 날아옵니다. 그 앞에서 한숨이 먼저 나오는 것은, 속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팍팍하게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섭섭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계속 얼굴 보고 일하는 사람이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을 때, 혹은 부모님 상에 아무런 표현이 없었을 때, 마음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은 원래 관계 속에서 기대를 만들고, 기대가 어긋날 때 섭섭함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감정은 이해만으로 정리되지 않는 것. 그것이 경조사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참석이냐, 봉투냐, 메시지냐 —
장례식장이 더 외로운 이유
결혼식이라면 참석 여부가 또 다른 고민입니다. 서울에서 열린다면 시간만 낼 수 있으면 되지만, 지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반나절, 혹은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지방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심 어린 축하 메시지와 적정 선의 축의금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장례식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하받을 자리는 사람이 넘치지만, 위로가 필요한 자리는 늘 빈 곳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을 더 챙기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마주친다는 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위로입니다. 업무적으로는 매번 부딪히고 날을 세우던 사이였을지라도, 슬픔 앞에서 손을 맞잡는 순간 모든 앙금은 잠시 눈 녹듯 사라집니다.
직접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부의금을 먼저 전달하고, 장례가 끝난 뒤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중요합니다. 잠깐이라도 빈소에 들러 고개를 숙이는 예의, 바쁘고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당신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표시. 어쩌면 경조사는 그 작은 표시들을 통해 우리가 아직 완전히 무심한 사람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얼마'보다 '거리'를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결혼하면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내게 얼마를 했는지가 먼저 떠오른다고요. 섭섭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 경조사에는 오랫동안 상부상조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중요한 날에 마음과 돈을 보탰으니, 언젠가 내 차례가 오면 당신도 그 마음을 돌려줄 것이라는 믿음. 일종의 무이자 할부와 같은 사회적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믿음이 예전만큼 단단하지 않습니다. 조직은 더 빨리 바뀌고, 부서는 자주 이동하고, 사람들은 더 쉽게 회사를 떠납니다. 비혼을 선언하는 동료가 늘고, 이직이 잦아지며 '내가 낸 만큼 돌려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그래서 경조사비를 내면서도 '나중에 돌아오겠지'라는 생각보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마음이 먼저 앞서게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솔직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내고 있는 것은 액수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쌓인 시간, 함께 버틴 프로젝트, 건네받은 위로, 말없이 느꼈던 동료애. 그런 것들의 총합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같은 5만 원 이어도 누군가에게는 정중한 마음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례적인 인사가 됩니다. 반대로 금액이 크지 않더라도 직접 와서 눈을 맞추며 축하해 주거나, 조용히 손을 잡아주는 순간은 오래 남습니다. 돈은 분명 필요하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각자도생'의 시대, 평생직장의 추억
예전에는 돌잔치와 환갑잔치까지 회사 동료들을 초대하고, 온 동네가 함께 축하했다고 합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강했던 시절, 동료는 곧 가족의 확장판이었습니다. 회사가 공동체였고, 그 공동체 안에서 경조사는 모두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예전처럼 회사가 삶의 중심이고 동료가 가족 같은 시대는 많이 지나갔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도 희미해졌고, 개인의 생활과 경계는 훨씬 또렷해졌습니다. 가족끼리만 조용히 예식을 치르거나 장례도 최소한으로 알리는 분위기가 늘어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각자의 주말과 삶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배려가 먼저인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 변화가 서글프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제야 '보여주기식 관계'에서 벗어나 진짜 소중한 이들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관계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근본적인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정답 대신, 내 기준을 세우는 일
그래서 이제는 누가 딱 잘라 정답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됩니다. 대신 내 안에 기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매번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매일 함께 일하는 부서원과 가까운 협업 동료에게는 조금 더 성의를 다합니다. 가능하면 참석하고,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의 표현을 합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예전 인연이지만 지금은 멀어진 관계라면 내 형편 안에서 무리하지 않는 선을 지킵니다. 연락이 끊겼다가 갑자기 날아온 청첩장에는 마음만 보냅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진심으로 도와준 선배나 동료라면, 거리가 멀어도 기꺼이 달려갑니다.
참석이 어렵다면 말 한마디라도 분명하게 전합니다. 특히 장례식은 가능한 한 자리를 지키려 노력합니다. 지방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위로가 필요한 자리에서 빈 곳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금액보다 태도에서 인색해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내 생활을 무너뜨릴 정도로 억지로 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생활과 경제를 크게 해치지 않는 선 안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나 너무 차갑지 않게. 그 정도의 기준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 노릇'이 어렵다는 말 앞에서
가끔은 정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 노릇하며 사는 일이 참 어렵다고요. 축하해야 할 때 기쁘게 축하해 주는 일도, 위로해야 할 때 적당한 거리에서 다정하게 손 내미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내 형편도 있고, 상대와의 관계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내 분위기도 있으니까요.
경조사는 결국 관계의 시험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많이 하고도 생색을 내고, 누군가는 크지 않은 표현 속에서도 오래 남는 따뜻함을 건넵니다. 회사라는 공간은 일로 만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자주 사람의 온기를 기대합니다.
청첩장이 결제 대금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 관계의 유통기한이 다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꺼운 마음으로 봉투를 준비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직장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마음을 나눌 진짜 동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믿고 싶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일이 의미 있다는 것을. 내가 힘들 때 빈소를 지켜준 동료의 얼굴은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결혼식 날 웨딩홀 가득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익숙한 동료의 얼굴이 보일 때의 그 반가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경조사를 어디까지 챙겨야 하느냐는 질문에 완벽한 답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챙김의 범위를 묻는 질문은 사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없지만, 기준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 안에 최소한의 예의와 약간의 온기가 함께 들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 노릇' 하기 참 힘든 세상이라지만, 어쩌면 그 '노릇' 덕분에 우리가 이 삭막한 일터를 함께 버텨내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봄날 날아든 청첩장 앞에서 한숨이 먼저 나온다면, 잠시 멈춰 그 동료와 함께 나눴던 따뜻한 커피 한 잔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그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완전히 무심한 사람이 되지는 않은 것일 테니까요.
여러분은 회사 동료의 경조사를 어디까지 챙기고 계신가요? 축의금과 부의금, 참석의 범위에 대해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으시다면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기준과 에피소드가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동료들에게 작은 위로와 팁이 될 것입니다.
Sonnet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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