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인'이라는 말이 내 오래된 외로움에 이름을 붙여준 날
어딘가에 완전히 속해본 적이 없다는 감각
저는 오래전부터 어딘가에 완전히 속해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누군가와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배척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저는 대체로 무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맡은 일은 해냈고, 필요한 예의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늘 제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있기는 한데, 정말 여기 속해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어떤 날은 희미했고, 어떤 날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또렷했습니다. 특히 회사에서는 그 감각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얼마 전 새로운 부서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그랬습니다. 낯선 공기가 맴도는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있을 때면, 저는 종종 제 자신이 거대한 공간 안을 떠다니는 작은 먼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지는 분명 그 공간 안에 있습니다. 빛을 받으면 보이고, 공기 속을 떠다니고, 어딘가 닿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느 자리에도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이미지가 이상하게 제 마음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의 톱니바퀴 속에서 제 몫의 일은 묵묵히 해내고 있었지만, 동료들과 끈끈한 소속감을 느끼기보다는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는 왜 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 같을까?
왜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기보다, 잠시 머물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까?
어쩌면 제 마음은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리에 섞여 안정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 있는 자리에서 비로소 내 호흡을 되찾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늘 '같이'보다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예 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편한 사람도 있었고, 깊이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사람 속에 오래 있으면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모임이 길어질수록 표정이 굳었고, 말수가 줄었고, 머릿속은 점점 탁해졌습니다. 즐거워야 하는 자리에서 저는 종종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특히 회식 자리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회식은 늘 제게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은 차라리 명확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얼마나 잘해야 하는지도 어느 정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회식은 달랐습니다. 언제 웃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맞장구를 쳐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온도로 어울려야 하는지. 너무 조용하면 이상하고 너무 빨리 빠지면 눈치 없어 보이는 그 자리는 저에게 늘 작은 시험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자꾸 제 자신을 의식했습니다. 지금 내가 너무 딱딱해 보이지는 않는지, 말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지, 사람들에게 불편한 사람으로 읽히지는 않는지.
혹시 마찰이 생길까 봐 윗사람에게 깍듯하고 정중하게, 어쩌면 방어적일 만큼 예의를 갖추어 대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그분들을 깊이 존경해서가 아니라, 저만의 고요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쳐둔 안전하고 정중한 울타리에 가까웠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아챘습니다. 저는 무리에 속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속하지 않은 채로 평화롭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신경 쓰다 집에 돌아오면, 이상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무언가 쭉 소모된 것 같은 느낌. 마치 하루 종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다 퇴근한 배우처럼.
그럴 때마다 저는 저를 탓했습니다.
다들 하는 걸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할까?
왜 나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지 못할까?
왜 나는 관계를 이렇게까지 에너지 소모로 느낄까?
남의 시선을 생각보다 덜 두려워하며 살아온 시간
신기한 것은, 저는 또 남의 시선을 아주 많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상처를 받습니다. 저에 대한 오해가 억울할 때도 있고, 무심한 말 한마디가 하루를 가라앉히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평가가 제 존재 전체를 흔드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늘 제 안에 작고 단단한 방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방 안에는 제가 옳다고 믿는 것,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고요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밖에서 어떤 말이 오가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 방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 잘 지내기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을 조정합니다. 조금 불편해도 웃고, 조금 아니어도 고개를 끄덕이고,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은 넘기며 관계를 유지합니다. 저도 그렇게 해왔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그 방식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쉽게 휩쓸리지 않았고, 쉽게 동조하지 않았고, 쉽게 무리의 온도에 저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제가 너무 독립적인가 싶었습니다.
너무 혼자인가 싶었습니다.
너무 제 기준만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때로 차가운 사람처럼 읽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차가움이라기보다, 제 마음의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쉽게 휩쓸리지 않는 대신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다 좋다고 말할 때도 속으로 한 번 더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정답을 대신하는 순간에도, 정말 그런가를 조용히 의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기준이 없었다면 저는 더 많이 무너졌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향인'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
저는 조금 울컥했습니다.
그러다 '이향인'이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뉴욕의 정신과 의사 라미 카민스키가 쓴 책 《이향인》에서였습니다. 이향인, 오트로버트. 내향인도 아니고, 외톨이도 아닌 사람. 집단 안에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완전히 녹아들지 않는 사람.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 다르고, 안정감을 느끼는 구조가 다르며, 사고의 출발점이 '우리'가 아니라 '나'인 사람.
[이향인 경향 체크]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어디에 가도 완전히 섞인 느낌은 잘 없다.
-소속감이 없다고 해서 내가 무너지는 편은 아니다.
-타인의 인정이 없더라도 내 기준으로 버틸 수 있는 편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것에 나까지 꼭 동조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무리 속에 있을 때도 한 발 떨어져 분위기를 관찰하는 편이다.
-유행, 분위기, 집단의 열광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수보다 내가 숨 쉬기 편한 거리감이 더 중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라기보다 내 중심을 되찾는 시간에 가깝다.
-단체에 적응할 수는 있지만, 그게 나답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남들이 다 맞다고 할 때도 속으로는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관계가 줄어들어도 자기 가치가 사라진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안으로만 향한 사람’이라기보다 ‘남들과 다른 방향을 보는 사람’에 가깝다.
처음에는 그 말이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읽다 보니 이상하게 제 안에 오래 쌓여 있던 감정이 건드려졌습니다.
늘 조직 안에서 약간 비껴 서 있던 감각,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도 끝내 완전히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던 시간들, 사람들 속에 있어도 자꾸만 혼자라는 감각으로 되돌아오던 순간들.
그 문장들을 읽는데, 저는 묘하게 마음이 아팠습니다. 위로받아서 아픈 것인지, 너무 늦게 이해받아서 아픈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향인은 소극적이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고. 오히려 매우 예의 바르고, 타인을 깊이 배려하며, 공감 능력도 뛰어납니다. 다만 그 공감이 집단 감정에 자동으로 동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뿐이라고.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다른 구조'라고, 고쳐야 할 성향이 아니라 이해되어야 할 기질이라고.
그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잠깐 멈췄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원래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나만 유독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나만 조직 안에서 겉도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 사실 하나가 저를 조금 울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합니다. 정확한 병명이나 진단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견딜 수 있는 날이 있습니다. 저에게 '이향인'이라는 단어는 그런 종류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조직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소모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전의 저는 자꾸만 남들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조금 더 붙임성 있게,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사람들과 쉽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그래야 괜찮은 사회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수록 저는 점점 더 지쳐갔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조금씩 말라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적당히 맞춰 웃은 날일수록 혼자 돌아왔을 때 더 공허했습니다. 제가 진짜 싫었던 것은 조직생활이 아니라, 저를 계속 지워가며 해야 하는 조직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은 18장에서 이향인을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없는 솔리스트"라고 표현합니다. 그 비유를 읽으면서 저는 한참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솔리스트의 몸으로 단원의 자리에 앉아 박자를 맞추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늘 무언가가 어긋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향인에게 필요한 건 조직에 녹아드는 방법이 아닙니다. 조직 안에서 나를 잃지 않는 방법입니다.
억지로 관계형 인간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
모든 자리에 다 참여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나쁜 구성원처럼 여기지 않는 것.
지칠 때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죄책감 없이 지키는 것.
저 같은 사람에게 혼자는 고립이 아닙니다. 정비입니다. 회복입니다. 조용히 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물론 독립적이라는 말 뒤에 숨어 타인을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독립성과 무심함은 다르고, 거리감과 무례함은 다릅니다. 무리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더라도,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고, 필요한 예의를 지키고, 누군가를 함부로 소외시키지 않는 태도는 끝내 중요합니다. 저는 그 균형을 배우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저는 저를 버리지 않고 싶었습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저는 어릴 때부터 이미, 남들에게 기대는 법보다 혼자 버티는 법을 더 먼저 배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늘 조금 경계했고, 누군가와 가까워져도 끝까지 제 안의 방 하나는 닫아두었고, 어느 곳에 가도 아주 깊이 뿌리내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외로움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외로웠습니다. 가끔은 저도 누군가 속에 완전히 녹아들고 싶었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도 이해받고 싶었고, 애쓰지 않아도 편한 자리를 갖고 싶었고, '같이 있다'는 말이 정말 따뜻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서는 편히 내려앉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저는 늘 저를 잃는 방식의 소속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맞추고, 무리하게 웃고, 제 불편을 무시하면서까지 얻는 관계는 오래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끝내 저를 버리지 않는 쪽을 택해온 것 같습니다.
치열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으면, 비로소 진짜 저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된 고요한 주방에서 재료를 다듬고,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책상에 앉아 흩어진 생각들을 활자로 끌어올리는 시간. 이 소박하고 확실한 루틴은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흔들린 배를 안전한 항구에 정박시키는 의식과도 같습니다. 혼자 전시를 보러 가거나, 좋아하는 책의 문장을 곱씹거나, 조용히 여행을 떠나는 그 완전한 고독 속에서 저는 오히려 가장 풍요로운 나를 만납니다.
돌이켜보면 그 고독이 저의 외로움이었고, 저의 고집이었고, 또 저의 힘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조금 덜 오해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정말 이향인인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이 모든 사람을 명확하게 나눠주는 기준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제 저를 예전처럼 쉽게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한 저도, 회식 자리에 가면 점점 기운이 빠지는 저도, 남들이 저를 안 좋게 생각해도 생각보다 크게 흔들리지 않는 저도, 제 안의 기준을 쉽게 접지 못하는 저도, 조직 속에서 늘 조금 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저도. 모두 잘못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저 세상이 권하는 방식과는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소속보다 중심이 더 중요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함께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 더 절실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오랜 외로움이 아주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제가 부족해서 생긴 감정이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온 방식이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지는 어디에도 붙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들어올 때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혼자 조용히 부유하다가, 빛을 만났을 때 눈부시게 드러나는 것. 저는 이제 그 이미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쉽게 기대지 않고도 나를 세우며 살아온 사람이었다고. 늘 가장자리에 있었던 것이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나만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오래된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 마음을 설명하는 말이 '이향인'이라면, 저는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제 마음 곁에 두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저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이제는 저라도 저를 이해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참고 도서: 《이향인 — 세상 밖에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 라미 카민스키 저, 21세기북스,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