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달라는 나라에서, 살아도 되냐고 묻는 사람들

영화 '플랜 75'가 비추는 우리의 내일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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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이 짐이 되는 시대


한 노인이 길모퉁이에서 구인 안내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78세, 혈혈단신, 특별한 기술도 없습니다. 돌아갈 집은 있지만 난방비를 낼 돈이 없고,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는 여인숙 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미치. 일본영화 《플랜 75》의 주인공입니다.


영화는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합니다. 초고령사회의 부담을 견디다 못한 정부가 75세 이상 국민에게 자발적 안락사를 권장하는 제도, '플랜 75'를 시행합니다. 신청자에게는 정리 자금 10만 엔이 지급되고, 마지막 여행과 장례까지 국가가 돌봐줍니다. TV에서는 제도를 이용한 노인들의 행복한 증언이 흘러나옵니다. 절차는 친절하고, 상담원이 배정되며,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조용하고, 그래서 더 소름 끼칩니다.


영화 초반, 한 청년이 양로원에 난입해 노인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2016년 일본 사가미하라 장애인시설 살상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씨앗입니다. 개인의 혐오가 사회의 합의로, 합의가 제도로, 제도가 일상으로 스며드는 과정. 플랜 75는 그 끝에 놓인 풍경입니다. 칼을 든 범죄자와 서류를 내미는 공무원 사이의 거리가, 이 영화 속에서는 생각보다 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밀어내는 폭력이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표정으로 "이제 그만해도 된다"라고 말하는 사회의 얼굴.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첫 번째 공포입니다.


일하다 죽거나, 신청해서 죽거나


미치는 평생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살아온 여성입니다. 국가 복지의 혜택을 받은 적도, 받으려 한 적도 없습니다. 여인숙 청소부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동료의 돌연사 이후 여인숙은 고령 직원 전원을 해고합니다. 사람이 죽을까 봐 — 정확히는, 사람이 죽었을 때 책임지기 싫어서.


다시 일자리를 구해보지만, 75세가 넘은 몸을 받아주는 곳은 없습니다. 겨우 구한 자리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육체노동이었습니다. 돈이 없으니 친구도 멀어지고, 잠잘 곳도 줄어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벗이 식탁에 엎드린 채 며칠째 발견되지 못한 모습을 미치가 직접 목격합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아무런 존엄도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미치는 생각 합니다. 저렇게 죽느니, 차라리 내가 선택하겠다고.


이것이 플랜 75의 가장 교묘한 지점입니다. 제도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선택지를 하나씩 지워갈 뿐입니다. 일자리를 없애고, 안전망을 거두고, 고독사의 공포를 보여준 뒤, 마지막에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편안하게 가시겠습니까?" 계속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고, 혼자 살기에도 현실은 점점 팍팍해집니다.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발판은 줄어드는데, 죽음으로 가는 길은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복잡하고 비용이 드는데, 죽는 것은 편리하고 친절하고 제도적으로 지원받는 사회. 그 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권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외롭고, 가난하고, 돌봄이 없고, 사회가 필요 없다고 느끼게 만든 뒤 내리는 결정을 과연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자발적 선택이라는 외피 아래, 구조적 강요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절이라는 이름의 폭력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폭력이 아니라 미소입니다.


콜센터 상담원 요코는 플랜 75 신청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불안을 달래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어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따뜻합니다. 문제는 그 따뜻함의 목적이 "철회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상부는 지시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잘 잡아주라고. 돌봄의 언어가 통제의 도구로 전용되는 순간, 친절은 가장 세련된 형태의 폭력이 됩니다. "당신의 선택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살아갈 조건을 하나씩 제거해 버리면, 그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청 공무원 히로무는 플랜 75 신청서를 사무적으로 처리하던 청년입니다. 그에게 이 업무는 서류 위의 번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삼촌이 신청자로 나타납니다. 추상적이었던 '제도'가 삼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순간, 히로무의 세계는 무너집니다. 취소를 권유하지만 삼촌은 단호합니다. "미련이 없다"는 한마디에 히로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남의 죽음은 업무였지만 삼촌의 죽음은 상실이었습니다. 같은 서류, 같은 절차인데 사람이 달라지니 의미가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이 제도의 가장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플랜 75 이용자가 세상을 떠난 뒤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그녀의 일입니다. 일본 사회가 자국의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제도의 뒤처리를, 또 다른 사회적 약자가 묵묵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 약자의 죽음 위에 다른 약자의 생존이 포개져 있는 이 구조는, 이 영화가 단순한 노인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착취 메커니즘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숫자 뒤에 가려진 얼굴들


고령화 사회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주 숫자를 먼저 꺼냅니다. 노인 인구 비율, 부양비, 의료비, 요양비, 복지 예산, 국민연금 고갈 가능성 같은 단어들이 뒤따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한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재정과 제도를 논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사람을 잊게 됩니다.


노인은 하나의 통계 항목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이웃이며, 누군가의 미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 젊다고 믿는 우리 모두가 결국 향하게 될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령화를 말할 때 종종 '앞으로 증가할 사회 비용'을 먼저 떠올립니다. '비용'이라는 말은 차갑고 정확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합니다. 사람을 지출 항목으로 보기 시작하면 존엄은 가장 먼저 잘려나가기 때문입니다.


영화 《플랜 75》가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총으로 쏘거나 강제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그저 사회가 이미 품고 있던 생각을 조금 더 제도적으로 정리해 보여줄 뿐입니다. "너무 오래 사는 것은 민폐 아닐까." "자식에게 짐이 되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태도 아닐까." "복지 재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이 문장들은 어쩌면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현실 속 우리 마음 어디엔가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말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화는 미래를 예언한다기보다 현재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정말 노인을 존중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의를 갖춘 언어로 배제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몸이 먼저 대답하다.


영화의 결말은 조용하지만 강렬합니다.


미치와 히로무의 삼촌은 같은 날, 같은 시설에서 조력사를 받게 됩니다. 병원처럼 침대가 나란히 놓인 방, 커튼 하나로 칸이 나뉜 공간입니다. 히로무의 삼촌은 미련 없이 약을 삼키고 잠들 듯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미치는 커튼 틈으로 그 장면을 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그 순간 미치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논리도, 계산도 아닌 생존 본능이 미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웁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시설을 걸어 나옵니다. 아무도 막지 않습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습니다. 미치는 센터 밖 언덕에 서서, 저무는 태양을 바라봅니다.


내일 뭘 먹을지도, 어디서 잘지도 모릅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살아 있기로 한 것입니다.


이 장면 뒤에 뉴스 한 줄이 흘러나옵니다. "정부는 플랜 75의 성과에 고무되어, 대상 연령을 65세로 낮춘 플랜 65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미치가 걸어 나온 그 문 뒤에서, 제도는 멈추지 않고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를 방치하면 다음 순번은 '당신'이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미치가 걷는 길은 우리 모두의 길입니다.


영화를 보며 가장 마음이 아픈 지점은 미치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둔 인물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큰 병이 없더라도, 특별한 사고가 없더라도, 그저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사회에서 점차 자리를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미치처럼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볼 수 있을까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나라입니다.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국민연금 기금은 2055년 고갈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청년 세대는 "우리가 낸 연금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 속에 살고, 노인 세대는 "오래 사는 것이 죄가 된 세상"이라는 체념 속에 있습니다. 세대 간 갈등은 깊어지고, 노인은 점점 '사회적 비용'이라는 숫자로만 호명되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순간, 나이 든 사람은 언제든 밀려날 수 있습니다. 젊을 때는 일을 잘하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만, 늙고 병들면 무엇으로 자신의 가치를 설명해야 할까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살아도 되는 것이라면, 인간의 존엄은 너무 쉽게 흔들리고 맙니다.


결국 고령화의 본질은 노인이 많아진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사회를 준비하지 못한 채 오래 살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의료기술은 수명을 늘렸지만, 사회는 아직 삶의 후반부를 충분히 설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노후는 축적된 평안이 아니라, 버텨야 하는 긴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오래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앞에서, 결국 우리는 현실적인 답을 고민하게 됩니다.


노후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젊을 때 준비 못 한 본인 잘못"이라는 말은 쉽지만 잔인합니다. 누구나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임금 수준도 다르고, 가족 구조도 다르고, 건강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겨우 오늘을 버티며 살았을 뿐인데, 미래까지 완벽히 준비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습니다.


돈만이 아니라 관계의 노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노년의 빈곤만큼 무서운 것이 노년의 고립입니다. 영화 속 미치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거창한 제도보다도, 자신을 사람으로 대하는 시선이었습니다. 함께 말 걸어주는 사람, 안부를 묻는 사람, 여전히 존재를 인정해 주는 관계. 노후 준비는 통장 잔고만이 아니라, 함께 늙어갈 관계망을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노동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쉬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한 휴식을 보장해야 합니다. 지금 사회는 종종 "일하기엔 늙었고, 쉬기엔 가난한" 상태로 노인을 방치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권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죽을 권리'가 아니라 '살아갈 조건'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유용하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돌봄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는 돌봄이 필요하고, 환자는 도움이 필요하고, 노인도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삶의 순환입니다. 그런데 유독 노년의 의존만 유난히 부정적으로 말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늙어갈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사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미치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시설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지는 해 한 줄기뿐이었습니다. 내일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고, 누군가 손을 내밀어줄 약속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살기로 했습니다. 이유 없이, 조건 없이, 그냥 살아 있겠다고.


그것은 논리가 아니라 존엄이었습니다.


영화 《플랜 75》는 죽음의 제도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삶의 조건을 묻고 있습니다. 노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오래 사는 시간이 존엄하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 배제와 무력감 속에서 버텨야 하는 긴 생이라면, 사람은 삶보다 퇴장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진짜 과제는 수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인간답게 채울 것인가에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언젠가 늙습니다. 저도 늙습니다. 미치의 미래는 곧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때 우리가 서 있을 언덕 위에, 해가 지고 있을까요, 뜨고 있을까요. 그 답은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해도 괜찮고, 속도가 느려져도 괜찮고, 생산성이 줄어들어도 여전히 존엄하다고 말해주는 사회. 오래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 그것을 만드는 일은 먼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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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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