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주인아의 두 집 살림이 던진 질문

사랑은 정말 한 사람하고만 가능한가?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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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편을 원하는 여자라는 낯선 설정 앞에서


박현욱의 소설과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신선함보다 당혹감이었습니다. 두 명의 남편을 원하고, 실제로 두 가정을 꾸려 나가는 여자라니...


설정만으로도 쉽게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많은 분들이 그랬듯 저 역시 "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어도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두 명의 남편과 두 개의 가정을 감당하려는 삶은 너무 피곤하고 벅차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작품은 불편함 속에서 오래 남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극적인 소재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작품이 건드리는 것은 불륜이나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사랑과 결혼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한 사람에게만 가능해야 하는지, 결혼은 소유와 독점의 약속인지, 그리고 그 약속을 깨는 사람은 왜 유독 여성일 때 더 큰 비난을 받는지 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주인아는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많이 가진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축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취향을 지녔으며, 일상에서도 매력적입니다. 흔히 대중 서사 속에서 "이런 여자는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공식을 충실히 구현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토록 매력적인 여성은 결국 한 남자의 연인이 되거나 한 가정의 아내로 수렴됩니다. 그런데 주인아는 거기서 벗어납니다. 한 사람을 선택해 안착하는 대신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하고, 두 사람 모두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매혹적인 연애 상대를 넘어 기존 질서를 흔드는 문제적 인물이 됩니다.


줄거리 — 사랑과 제도의 충돌


이 작품의 줄거리는 얼핏 보면 단순한 삼각관계처럼 보입니다. 남자 주인공 덕훈은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주인아에게 빠집니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인아는 처음부터 전형적인 연애관을 가진 여성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물입니다. 덕훈은 그런 그녀의 태도에 불안해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놓지 못하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문제는 결혼이 인아를 전통적인 아내로 바꾸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덕훈은 결혼을 통해 관계가 안정되고, 자신이 그녀를 온전히 갖게 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인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남자 한재경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역시 거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인아는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하고,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는 삶으로 들어갑니다.


이 설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중 인아가 단순히 쾌락을 좇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하고, 두 관계 모두에 성실하고자 애씁니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판타지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고단해 보입니다. 두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인아의 삶은 더욱 바빠지고 더욱 복잡해집니다. 두 집을 챙기고, 두 관계를 유지하고, 두 사람의 감정까지 떠안아야 하니 로맨틱한 해방이라기보다 노동이 배가된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말은 더 쓸쓸합니다. 딸의 돌잔치 날 덕훈이 모든 것을 폭로하고, 두 남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인아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고 혼자 스페인으로 떠납니다. 두 남자를 데리고 간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먼저 사라지고, 이후 덕훈과 재경이 함께 그녀를 찾아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두 집 살림의 피로를 견디다 결국 혼자 사라지는 인아의 뒷모습은, 자유로운 사랑의 승리라기보다 그 대가를 혼자 감당한 사람의 뒷모습에 가깝습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 시대가 바꾸지 못한 것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오래된 가요 속에서 남성은 떠돌며 탐험하는 주체로, 여성은 그를 기다리며 정착하는 객체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이 비유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바람둥이'라는 단어를 남성에게는 일종의 훈장처럼, 여성에게는 금기시되는 낙인처럼 부여해 온 맥락과 닿아 있습니다.


대중문화 안에서 여러 여자를 오가는 남성 캐릭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때로 나쁜 남자의 매력으로 소비되기도 하고, 철없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반면 여성이 같은 욕망을 가질 때, 서사는 달라집니다. 그녀는 이해받지 못하거나, 처벌받거나, 결국 혼자 남겨집니다. 주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을 떠납니다.


시대는 변했다고 말하지만, 여자의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천천히 변합니다. 소설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어도, 이 작품의 설정은 여전히 낯섭니다. 그 낯섦은 단순히 서사가 드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성의 욕망을 얼마나 제한된 틀 안에서만 상상해 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당시에도 신선했고, 지금 다시 읽어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작가가 던진 질문은 일처다부제가
아니라 사랑의 독점성입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사실 "여자가 남편 둘을 갖는다"는 자극적 설정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사랑이 정말 독점적이어야 하느냐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진정성을 독점성과 연결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야 하고, 결혼했다면 배우자 외에는 누구도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현실의 감정은 제도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끌릴 수 있고, 제도가 요구하는 배타성을 감정이 끝까지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작가 박현욱은 인아를 통해 폴리아모리(polyamory)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사랑에 대해 당연하게 믿어온 것들, 그것이 정말 당신 자신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사회가 건네준 믿음입니까? 인아는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해결되지 않고,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또한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가 철저히 덕훈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인아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녀가 두 집을 오가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지치고 얼마나 충만한지 알 수 없습니다. 덕훈이 모르는 것처럼 독자도 모릅니다. 이것이 작가의 전략입니다. 주인아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독자 스스로 그녀를 판단하게 만드는 것. 그 판단이 어디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주인아는 악녀가 아니라 시대를 먼저
통과해 버린 인물인지도 모릅니다.


주인아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단순히 바람둥이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그녀는 계산적으로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는 전형적 악녀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주변 사람을 상처 입히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랑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쉽게 용납되기 어렵지만, 감정적으로는 묘하게 이해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빵 한 조각처럼 나누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촛불처럼 옮겨 붙일수록 밝아지는 에너지입니다. 덕훈을 사랑한다고 재경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재경을 사랑한다고 덕훈에게 불성실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 부모가 둘째 아이를 낳아도 첫째를 덜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다만 제가 끝내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욕망보다도 그 이후의 삶이었습니다.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하려 해 볼 수 있지만, 두 가정을 동시에 유지하는 삶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싶었습니다. 그것은 자유로워 보이기보다 몹시 고단했고, 사랑의 확장이라기보다 책임의 증식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의 중심이 인아에게 더 많이 실리는 모습은 아이러니했습니다. 제도를 깨고 나온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제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모습. 자유를 선언한 여자가 가사노동을 두 배로 짊어지는 모습. 그것은 해방이라기보다 또 다른 형태의 구속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아는 자유로운 여성일까요? 아니면 더 큰 짐을 짊어진 여성일까요? 아마 둘 다일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대신, 그 대가도 스스로 감당합니다. 그래서 해방적인 동시에 처절합니다. 시대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한 질문을 몸으로 살아낸 인물. 저는 그렇게 기억합니다.


이제는 결혼보다 여러 관계가
더 현실적인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와 지금은 사회 분위기가 꽤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비혼도 흔하고, 딩크도 특별하지 않으며, 결혼을 인생의 필수 코스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굳이 두 번 결혼을 해야 했을까요?


솔직히 오늘날에는 두 명의 남편과 두 개의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동시에 연애하거나 관계의 경계를 조금 더 느슨하게 설정하는 편이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결혼은 제도이고, 가정은 생활이며, 생활은 책임입니다. 반면 연애는 비교적 개인의 합의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본다면 "두 남편"보다 "오픈 릴레이션십"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주인아가 두 번 결혼을 고집한 것은 어쩌면 그 시대의 언어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진지하게 여기는 방식이 결혼밖에 없던 시대. 연애는 가볍고 결혼은 진심이라는 공식이 지배하던 시대. 그 시대의 문법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려다 보니, 두 번의 결혼이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 남자를 각각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니까요.


오픈 릴레이션십은 아직 낯설고 불편한 개념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의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가 아니라 합의와 존중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배타적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누군가는 조금 더 열린 관계에서 진실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고상하냐가 아니라, 서로가 같은 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인정해 달라고 한다면...


이 질문은 작품 밖에서 더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만약 내 연인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싶어.

그것을 인정해 줄 수 있어?


솔직히 저는 어렵습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세상이 변했고 관계의 형태도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일이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상대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올라오는 불쾌함은 논리로 제어되지 않습니다. 이해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와 가슴은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되고,
상대방은 안 된다는 이율배반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마 이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자유를 꿈꾸면서도, 상대방의 자유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참 이율배반적입니다. 스스로도 모순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늘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나의 자유는 낭만처럼 느껴지지만, 상대의 자유는 곧 상실처럼 느껴집니다. 내 욕망은 이해되지만, 상대의 욕망은 배신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설렘은 확장이라 부르면서, 상대가 느끼는 설렘은 배신이라 규정하는 그 모순. 어쩌면 사랑의 본질에는 이런 이기심이 처음부터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훈이 그랬습니다. 인아의 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덕훈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가슴으로 수용한 것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 대부분은 덕훈이기 때문입니다. 인아처럼 느끼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리고 인아처럼 느낀다 해도, 덕훈처럼 반응하는 상대를 만나면 그 사랑은 결국 파국을 향합니다.


누군가의 자유를 인정하는 일은 멋진 선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 불안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랑은 철학으로만 유지되지 않고, 인간의 취약한 감정 위에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불편하지만 유효합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모두를 설득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을 끝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주인아의 욕망은 선뜻 응원하기 어렵고, 그녀의 삶은 자유로워 보이기보다 피곤해 보이며, 그 선택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사랑의 문법을 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두 남편이 가능한가?"를 묻는 소설이 아니라, "사랑은 누구의 규칙으로 정의되는가?"를 묻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저는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사랑은 어느 정도 독점적이기를 바라고, 상대가 다른 관계를 인정해 달라고 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보수성이 절대적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인간의 관계도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게 정답을 준 작품이 아니라, 불편한 질문을 남긴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나는 정말 한 사람만을 원하고 있는가? 사랑은 도덕의 문제인가? 감정의 문제인가? 자유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아니면 결국 더 많은 고통을 낳는가? 그리고 나는 왜 내 자유는 원하면서 상대의 자유는 두려워하는가?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힘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의 이야기로 볼 때는 파격적인 설정이지만, 막상 내 이야기로 끌어오면 누구보다 평범하고도 보수적인 마음을 발견하게 만든다는 점. 주인아를 보며 저는 그녀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녀처럼 살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어렵고도 매혹적인 숙제입니다. 그리고 주인아는 그 숙제를 가장 과감한 방식으로 풀어낸 인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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