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과 문학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남긴 기괴한 잔상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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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국 문학 최초의 일이었고, 전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세계가 인정한 거장의 작품을 이해해 보고자, 혹은 그 명성에 이끌려 많은 이들이 다시금 『채식주의자』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제 안에 남은 것은 경이로움이나 따뜻한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서늘했고, 그렇다고 단순히 자극적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래 잔상이 남았습니다. 읽는 내내 편안하지 않았고, 덮고 나서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이건 야설인가? 문학인가?


내용만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술 작품은 저급한 외설과는 태생부터 다를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두 영역의 차이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외설과 예술이 다루는 소재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 욕망, 금기, 파괴된 관계, 비정상적인 집착 같은 것들은 문학과 예술에서도 오래 다뤄져 온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채식주의자』 2부 「몽고반점」이 바로 그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형부와 처제의 성관계 장면. 사회적 통념과 윤리의 잣대로 본다면, 처제의 몸에 남은 몽고반점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결국 선을 넘고 마는 형부의 행동은 그저 파렴치한 불륜이자 근친상간일 뿐입니다. 활자로 적어 내린 상황 자체만 요약하자면 흔한 성인 소설의 자극적인 소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차이를 가르는 것은 무엇을 다루었느냐 보다,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감각으로 밀어붙였느냐?에 더 가깝습니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묘사의 방식입니다.


같은 장면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의 몸을 보여준다고 해서 모두 외설이 되는 것도 아니고, 노출이 있다고 해서 모두 저속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표현의 방식, 시선의 방향, 문장의 결, 장면의 배치. 이런 것들이 내용보다 훨씬 더 결정적입니다.


외설은 욕망을 소비하게 만들고, 예술은 욕망까지도 해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몸이 단지 성적 자극의 도구로만 소비된다면 그것은 외설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같은 몸이 인간의 불안, 상처, 권력관계, 욕망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면 그때는 예술이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한쪽은 대상을 납작하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그 대상을 통해 인간 존재 전체를 비춥니다.


한강은 도덕적으로 파탄 난 이 상황을 굉장히 기괴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직조해 냅니다. 형부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날것 그대로 분출하는 대신, 그것을 '작품을 만든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포장합니다. 꽃이 그려진 두 남녀의 몸이 얽히는 장면은 식물성의 무언가가 교미하는 듯한 묘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독자는 흥분하기보다 오히려 서늘해지고, 그 상황의 이상함과 뒤틀림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형부는 왜 그것을 작품이라고 믿었을까요?


소설 속 형부는 비디오 아티스트입니다. 그에게 영혜의 몸에 꽃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욕망의 실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예술이라 생각했고, 자신의 일생일대의 작품이라고까지 여기며 집착했습니다.


이 설정은 단순한 충격 장치가 아닙니다.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를 정면으로 묻는 장치입니다.


예술은 정말 모든 것을 허용하는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대상화하고, 파괴하면서도 그것이 아름답게 포장되면 작품이 되는가? 형부는 아마도 자신이 진실한 미를 추구한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믿음 안에는 타인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는 감각보다, 자신이 보고 싶은 이미지로 바꾸려는 욕망이 더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는 영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이 완성하고 싶은 장면 속에 배치합니다.


이 지점에서 예술과 폭력은 아주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꽤 섬뜩했습니다. 예술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욕망의 면죄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감각을 가졌다고 믿을수록,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본다고 여길수록, 타인의 동의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그 착각의 위험을 아주 불쾌하고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한강은 또 하나의 교묘한 함정을 팝니다.


형부의 시선으로 장면을 읽어나가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술가의 눈으로 영혜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나도 방금 영혜를 인간이 아닌 오브제로 바라봤구나. 그 자각이 오는 순간, 그 성적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는 공모자가 됩니다.


내용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독자 자신의 시선입니다.


대상화만 있느냐?,
아니면 의미가 남느냐?


이 소설이 일반적인 야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서사의 구조 때문입니다.


육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려 하는 기이한 여자 영혜라는 설정, 철저히 세속적인 기준에 갇혀 그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가족들. 소설 전체가 영혜를 타인의 시선으로만 서술하는 구조.


—1부는 남편의 시선, 2부는 형부의 시선, 3부는 언니의 시선.


영혜는 주인공이지만 단 한 번도 서술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작 이 소설은 영혜를 쉽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구원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설명 불가능성이 오히려 이 소설을 더 문학적으로 만듭니다. 독자는 영혜를 판단하기보다, 그녀를 둘러싼 시선들의 폭력과 한계를 보게 됩니다.


이 작품은 욕망이 충족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욕망이 어떻게 타인을 훼손하고 자기 자신마저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독자는 흥분하기보다 차라리 얼어붙고, 몰입하기보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영화 '아가씨'가 생각났습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떠올랐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아가씨〉를 처음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아름다운 야동이다.


두 여성 사이의 성적인 장면은 노골적입니다. 직접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로틱하다는 감각보다 아름답다라는 감각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왜였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 배우들의 연기, 시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의상, 촘촘하게 짜인 서사, 빛과 그림자의 배치, 카메라가 멈추는 지점. 모든 것이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을 직접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둘 것인지, 카메라는 어느 각도에서 누구의 몸을 바라볼 것인지. 이런 세부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의 성격을 바꿔버립니다.


말 그대로 카메라 각도의 미세한 차이, 문장의 호흡 하나, 장면의 배치 하나가 그것을 그냥 야동으로 만들 수도 있고, 예술 작품으로 남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명확한 공식이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의 영역이며, 동시에 그 감각을 설득력 있게 구현해 내는 창작자의 역량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벨문학상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분은 불쾌했고, 어떤 부분은 기괴했으며, 어떤 부분은 솔직히 변태적이라는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덮은 후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무겁고 불쾌에 가까운 감정들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 소설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오히려 한강이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아닌 불편함 을 남기는 것. 독자가 읽고 나서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찜찜한 채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


좋아하지 않아도 인정하게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읽고 나서 다시 펼치고 싶지는 않은데,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 작품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가 저에게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불쾌함이 오래 남는 것도
예술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책을 덮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활자로 묘사되었던 그 기괴한 장면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형부의 시선, 영혜의 무표정, 꽃문양이 그려진 몸. 물구나무를 서서 햇빛을 받으려 하는 영혜의 형상. 어느 대목은 문장의 질감으로, 어느 대목은 불쾌한 이미지로, 또 어느 대목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결로 남아 계속 떠올랐습니다.


단순히 자극적인 내용은 대개 빠르게 휘발됩니다. 소비되고 끝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님에도, 신경을 긁고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음에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예술이 꼭 기분 좋은 감동만 주어야 한다면, 세상의 많은 걸작들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불편함과 불쾌함, 거부감과 집착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험도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헛되이 소모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지 충격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각하게 만들고, 내 기준을 흔들고, 내가 왜 이토록 불편한지까지 묻게 만든다면 — 그것은 충분히 예술의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술은 취향을 넘어 잔상을 남깁니다.


외설과 예술의 차이를 명확한 선 하나로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감각의 영역이기도 하고, 표현 역량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같은 내용을 두고도 누군가는 저속하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미학적 성취를 발견합니다. 시대와 감수성에 따라 기준은 늘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 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외설은 순간을 자극하지만, 예술은 오래 남습니다. 외설은 대상을 소비하고 끝나지만, 예술은 소비하고도 끝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남깁니다. 외설은 몸을 보게 하지만, 예술은 몸을 통해 인간을 보게 만듭니다.


『채식주의자』는 달콤한 위로 대신, 예술과 외설의 경계,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는 몹시도 서늘한 경험을 남겨주었습니다. 기분 좋은 독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랫동안 저를 붙들었습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결국,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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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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