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후순결이라는 농담 앞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농담으로 진실을 말합니다. "요즘은 혼전순결보다 혼후순결이 대세야."는 말도 그렇습니다. 처음 들으면 웃기지만, 조금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꽤 복잡하고 쓸쓸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이 농담을 던지면 좌중은 폭소를 터뜨립니다. 하지만 그 웃음의 끝맛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합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향한 열망이 뜨겁다가도, 정작 결혼 후에는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과 가장 멀어지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한집에 살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는데도 이상하게 침대 위에서는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부부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부부는 시간이 갈수록 더 깊고 단단한 친밀감을 쌓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관계에서 섹스리스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찾아옵니다. 아이를 키우느라 지쳐서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 진이 빠질 만큼 소모되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연인이 아니라 생활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누군가를 욕망할 에너지보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드는 날도 많습니다.
여기에 자극적인 성인물과 19금 서사를 품은 플랫폼까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욕망은 손쉽게 소비되고, 친밀감은 점점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사랑보다 가장 쉬운 자극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단지 피로와 환경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랍니다. 그 아래에는 조금 더 오래되고 인간적인 딜레마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함이 주는 평안,
익숙함이 앗아가는 떨림
섹슈얼리티는 참 이상한 세계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 깊어질수록 욕망도 자연히 깊어진다고 믿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욕망은 안정이 아닌 낯섦에서, 평온이 아닌 위험에서 더 강렬하게 박동합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나를 잘 모르는 사람, 앞으로 다시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떤 상상은 더 자유로워집니다. 웃자고 하는 말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처음 본 여자"라는 말이 있는 것도, 단순히 가벼운 농담만은 아닐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본능은 낯선 상대에게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수십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이 진화의 습성은 현대의 일대일 일부일처제라는 도덕적 관념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우리 몸속에 새겨진 이 오래된 회로는 이성으로 쉽게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결혼이야말로 익숙함의 완성이라는 데 있습니다. 결혼은 서로의 얼굴을 매일 보는 관계이고, 가장 초라한 순간까지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을 보고, 밤에 지친 표정을 보고, 병들고 화내고 실망하는 모습까지 다 알고도 곁에 남아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는 분명 사랑의 가장 성숙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은밀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욕망을 드러내기에는 오히려 더 어려운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잃을 것이 적습니다. 부끄러움이 남더라도 그것이 오랫동안 기억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우자 앞에서는 다릅니다. 오늘 밤의 머뭇거림이 내일 아침 식탁까지 따라올 수 있습니다. 한 번 드러낸 어떤 욕망이 이후의 일상 전체에 그림자처럼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가장 솔직하지 못해지는 역설을 겪습니다.
사랑은 깊어지는데,
욕망은 왜 숨어버릴까요?
우리는 대체로 친밀한 관계야말로 내 모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라고 배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약함도, 결핍도, 심지어는 어두운 욕망까지 품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중을 원하고, 욕망은 무장 해제를 원합니다. 사랑은 오래 보기를 원하고, 욕망은 순간의 몰입을 원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하지만, 욕망은 종종 체면과 통제를 벗어던질 때 더 강해집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아이러니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현신적인 관계'야말로 자신의 성적인 측면까지도 솔직하게 내 보이기에 이상적인 관계일 것이라고 대체로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다. 200명의 하객들 앞에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사랑에게 라면 다소 파격적인 욕구를 내 보이더라도 창피해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독한 오해다. 침대 위에서 고무 마스크를 뒤집어쓴다든지 악한이나 근친상간자 행세를 하며 관계를 가질 상대라면, 앞으로 30년간 아침마다 밥을 함께 먹을 필요가 없는, 즉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더 편안할 수도 있다."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섹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한동안 책을 덮어두었습니다. 우리는 나를 가장 존중해 주길 바라는 사람 앞에서, 동시에 나의 가장 원초적이고 지저분한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너무 소중한 관계일수록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고, 너무 오래 함께할 사람일수록 이상하게 조심하게 됩니다. 그러니 욕망이 줄어든 부부를 두고 단순히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생활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더 솔직해지는 이유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오히려 가장 말하기 어려운 속내를 털어놓았던 순간 말입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혹은 익명의 공간에서, 혹은 잠깐 스쳐 가는 인연에게 오히려 진심에 가까운 말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익명성입니다. 관계의 지속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솔직함을 허락합니다. 섹슈얼리티의 영역에서도 그 심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도덕적 자아와는 다른 층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점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저 하룻밤 즐길 사람을 따로 두고 싶어 하는 욕망은, 과연 남성들만 가진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여성들도 결코 결백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자들이 여성을 성모 마리아(사랑하는 사람)와 창녀(하룻밤 즐길 사람)로 나누는 것은, 여자들이 남자를 '착한 남자'와 '나쁜 남자'로 나누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쁜 남자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들은, 결론으로는 따뜻하고 자상하며 대화가 통하는 '착한 남자'에게 끌린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성관계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대륙으로 떠날 공리에 빠진 무정한 '나쁜 남자'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섹스』
물론 이것을 모든 남성과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성별만으로 단정할 수 없고, 시대와 개인의 상처와 관계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르게 움직이니까요. 다만 이 문장이 건드리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늘 선하고 안전한 것만 욕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욕망은 안정감보다 긴장감에서, 헌신보다 거리감에서, 보호받는 관계보다 위험해 보이는 장면에서 더 쉽게 깨어납니다. 그러니 사랑과 욕망이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욕망은 때로, 약해질 용기를 요구합니다.
부부 사이의 섹스가 어려워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생각보다 취약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고, 그것은 언제나 약자가 되는 일과 비슷합니다. 거절당할 수도 있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상대의 표정 하나에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시작하려면 더러 한쪽 파트너가 치욕스럽게 보일 만한 성적 욕구를 드러냄으로써, 약자가 되어야 한다. '창녀'와 '나쁜 남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감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진지하게 교제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 그리고 둘째는 그 덕분에 우리의 성적 기벽이나 부끄럽고 나약한 부분에 대해 평생의 목격자나 환기자로 남을 일이 없다는 점이다. 후자는 매우 그럴듯한 장점이기도 한데, 섹스는 너무 개인적인 행위라서 항상 봐야 하는 친밀한 사람과는 하기가 곤란한 경우도 종종 있다."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섹스』
결혼은 가장 안전해야 하는 관계인데, 가장 은밀한 욕망 앞에서는 오히려 더 두려운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나를 오래 아는 사람이기에, 나를 오래 기억할 사람이기에,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더 쉽게 벌거벗겨지지 못합니다. 육체보다 먼저 자존심이 움츠러들고, 욕망보다 먼저 체면이 문 앞에 서게 됩니다.
평생의 목격자!
이 단어가 핵심입니다. 침대 위에서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내일 아침 식탁에서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마주 앉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섹스리스는 종종 성욕의 부재가 아니라, 취약함을 드러낼 수 없는 관계의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욕망의 오래된 딜레마
이 난제를 가장 날카롭게 요약한 사람은 역시 프로이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12년에 발표한 〈사랑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상 천시의 경향에 대하여 On the Universal Tendency to Debasement in the Sphere of Love〉라는 논문에서, 그는 환자들에게서 너무 자주 목격한 가슴 아픈 딜레마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면 욕망이 없어졌고, 욕망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랑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상 천시의 경향에 대하여」(1912)
100년이 넘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 앞에서 저는 오래 머뭇거리게 됩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를 존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존중과 보호의 마음이 어떤 경우에는 욕망의 거칠고 본능적인 얼굴과 충돌합니다. 반대로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는 순간에는 상대를 온전히 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내 욕망을 비추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욕망은 늘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버립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가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회로가 서서히 약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함께 키우고, 서로의 아픈 모습을 보살피고, 지겨운 일상을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적인 욕망의 불씨가 조용히 잦아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성적 욕망과 충실한 결혼 생활은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둘이 저절로 함께 가지는 않는다고는 생각합니다. 사랑은 결심과 돌봄으로 유지되지만, 욕망은 의무감만으로 살아남지 못합니다. 사랑이 생활의 언어라면, 욕망은 상상력의 언어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 결혼 후에 욕망이 희미해졌다면, 그것은 도덕의 실패라기보다 상상력의 고갈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가 다시 연인이 되려면
그래서 저는 섹스리스의 문제를 단지 "누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부부가 사랑과 생활을 같은 그릇에 담아두고 오래 흔들린 끝에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마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편이 되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안전함은 커지지만 긴장감은 줄어듭니다. 신뢰는 쌓이지만 떨림은 줄어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완벽한 보호자가 되려고 노력하느라, 불완전한 인간이 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엄마와 아빠, 남편과 아내, 보호자와 실무자의 역할만으로는 욕망이 살아날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도덕심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낯설게 바라볼 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관계는 대화가 필요하고, 어떤 관계는 휴식이 필요하고, 어떤 관계는 생활의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는 연출이 필요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족으로만 살아온 두 사람이, 잠깐이라도 연인으로 돌아갈 시간 말입니다.
결혼 생활이 길어질수록 성적 친밀감이 줄어드는 대신, 다른 형태의 친밀함이 자리를 채우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아프면 내 일처럼 마음이 쓰이고,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고, 밥 한 끼를 함께 먹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관계. 이것은 처음의 뜨거운 욕망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렇다고 덜 소중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합니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동시에, 낯선 연인처럼 설레는 관계.
이것이 불가능한 욕심일까요?
아니면 계속해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이상일까요?
사랑과 욕망 사이,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혼후순결이라는 그 농담 속에는 현대의 부부들이 겪는 피로와 외로움, 사랑과 욕망 사이의 오래된 오해,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오히려 가장 취약해지기 어려운 인간의 아이러니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저절로 욕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욕망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이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리며, 때로는 죄책감을 느끼고,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농담으로 얼버무립니다.
사랑하면 욕망이 사라진다고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결혼 후의 사랑은,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게 애쓰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줄 알았던 마음의 온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보는 얼굴 속에서 낯섦을 되찾는 일, 익숙한 사람 앞에서 다시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일, 생활의 언어에 덮여버린 욕망의 언어를 조심스럽게 복원하는 일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 함께 밥을 먹는 일로 완성되지만, 욕망은 가끔 그 밥상에서 잠시 일어나 서로를 다시 바라볼 때 살아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더 깊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과 욕망은 함께 갈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느끼시나요?
지금 당신의 침실에는 어떤 공기가 흐르고 있나요?
뜨거운 욕망인가요?
다정한 온기인가요?
아니면 그저 피곤한 침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