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게임〉이 말하는, 자극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에 대하여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웬만한 문제는 해결된다고요.
좋은 집, 좋은 차, 안정된 직업, 사회적 지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산까지 갖추고 나면 인생의 많은 불행은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가난은 인간을 자주 초라하게 만들고, 선택지를 줄이며, 삶을 생존의 차원으로 몰아넣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 중에 생각합니다. 돈이 많아지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되면, 그다음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더 게임〉은 그 믿음을 정면으로 비틀어 보여줍니다.
감각이 죽은 사람의 언어
이 영화의 주인공 니콜라스 밴 오튼은 말 그대로 거의 모든 것을 가진 남자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저택, 천문학적인 숫자가 찍힌 은행 계좌, 명령 한마디면 무엇이든 처리되는 견고한 시스템. 그는 세상의 꼭대기에 앉아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하며, 세상은 그에게 대체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동생이 생일 선물을 건넵니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일 선물은 필요 없어.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니까."
이 한 문장이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것은 만족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감각이 죽은 사람의 언어였습니다.
필요가 없다는 말은 충족되었다는 뜻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떤 물건도 그를 설레게 하지 못하고, 어떤 이벤트도 그를 흔들지 못하며, 어떤 관계도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부족해서 힘든 사람이 아니라, 너무 채워져서 아무 감각도 남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장 축복받아야 할 이 대답이 사실은 가장 끔찍한 저주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결핍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는 것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역설적이게도 '결핍'입니다. 돈이 부족하기에 노동을 견디고, 사랑이 고프기에 타인에게 다가가며, 성취가 목마르기에 밤을 지새웁니다. 결핍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며,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삶의 동력입니다.
그렇다면 상상해 보세요. 만약 이 모든 결핍이 완벽하게 채워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니콜라스는 바로 그 완벽한 충족의 끝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습니다. 인간이 욕망을 채우면 권태가 오고, 권태를 피하려 욕망을 좇으면 고통이 온다고. 이 진자운동이 인간의 삶이라고. 니콜라스는 그 진자가 완전히 멈춰버린 사람입니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욕망 자체가 사라진 상태.
인간은 결핍만으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가끔은 과잉으로도 병들어 갑니다. 너무 오래 안전했고, 너무 오래 계산했고, 너무 오래 통제해 왔을 때 인간은 희한하게도 생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게 됩니다. 하루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운영하게 됩니다. 니콜라스가 딱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을 살지 않고, 인생을 통제합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사고가 없습니다. 우연도 없습니다. 열광도 없습니다. 대신 빈틈없는 일정과 차가운 매너, 그리고 무균실 같은 권태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버지가 투신자살했던 나이인 48세가 되며, 그의 내면은 아버지처럼 서서히 부서져 내리고 있지만, 겉으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최고급 슈트로 그 공허함을 덮어두고 있습니다.
권태는 가난한 감정이 아닙니다.
니콜라스의 권태는 단순히 심심함이 아닙니다. 심심함은 아직 가벼운 상태입니다. 권태는 더 깊습니다. 권태는 세상의 색이 빠져나간 상태이고, 반복되는 하루가 무의미하게 겹쳐지는 상태이며, 어떤 일도 진심으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병입니다.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권태는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가스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권태는 어떤 의미에서 부자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당장 내일 먹고살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 권태는 사치일 수 있습니다. 생존은 인간을 바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버티게 하고, 아등바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생존을 통과한 사람, 욕망의 많은 부분이 이미 충족된 사람에게는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다음은 무엇인가? 더 큰 집을 사면 되는가? 더 비싼 것을 갖게 되면 되는가? 문제는 인간의 감각이란 생각보다 빨리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격이었던 것도 곧 일상이 됩니다. 처음에는 꿈이었던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권리가 됩니다. 그리고 권리가 된 순간부터 감동은 사라집니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아주 인상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에게 무엇을 줄까?"
이것은 단순히 기발한 선물 아이디어를 묻는 농담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좋은 시계도, 더 좋은 와인도, 더 좋은 차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가진 것의 업그레이드는 감동이 아니라 재고 정리에 가깝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남는 유일한 선물은 어쩌면 물건이 아니라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오래 잃어버린 감각, 다시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감각.
로마인들은 왜 검투사의 피를 보러 갔는가?
기원전 로마의 콜로세움을 떠올려 봅니다.
황제부터 귀족까지, 당대 가장 풍요로운 사람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자가 사람의 목을 물어뜯고, 칼과 칼이 부딪히며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 야만적인 광경 속에서, 그들은 안전한 관중석에 앉아 타인의 생존 투쟁을 '소비'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잔인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명은 발달하고, 먹고사는 문제가 일정 정도 해결된 사회는 자주 강한 자극을 찾습니다. 너무 안전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타인의 극단을 통해서라도 살아 있음의 감각을 빌려오고 싶어 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벼랑에 서지는 않지만, 누군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뛰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달콤한 것을 평생 먹어온 사람에게 설탕은 단맛이 아니라 그냥 일상이듯, 마찰이 없으면 열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무균실에서 그들은 피 냄새를 맡으며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려 했던 것입니다.
오징어게임이 보여준 진실
수천 년이 흘러도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의미심장한 설정이 있습니다. 목숨을 건 게임을 지켜보는 존재들은 극빈층이 아닙니다. 황금 마스크를 쓴 전 세계의 초부유층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을 오락으로 소비합니다. 게임의 설계자였던 오일남의 대사는 이 기형적인 심리를 정확히 관통합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절대적인 빈곤이 생존을 위협하여 삶의 재미를 앗아간다면, 절대적인 부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삶의 마찰력을 0으로 만듭니다. 〈더 게임〉의 세계와 〈오징어 게임〉의 VIP들은 이 지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이들은 더 이상 평범한 쾌락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고급 음식, 고급 취미, 고급 서비스로도 채워지지 않는 감각의 공백. 그 공백은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합니다. VIP들은 그 차갑고 텅 빈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목숨을 판돈으로 거는 극단적인 도파민에 중독되고 맙니다.
이것은 악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감각이 죽은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무균실을 깨부수는 것, 게임의 시작
니콜라스의 동생 콘래드는 형이 이 무균실 안에서 질식해 죽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챕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권태와 허무에 잡아먹혀 언제 저택 지붕에서 몸을 던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형을 구하기 위해 그는 극약 처방을 내립니다. 그것이 바로 CRS의 '게임'입니다.
콘래드가 게임을 소개하며 하는 이 말이 처음엔 가볍게 들립니다.
"이건 형이 상상도 못 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거야."
그리고 CRS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채워드립니다."
부족한 것. 모든 것을 가진 남자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더 좋은 물건도, 더 넓은 집도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감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스에게 재미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거의 존재론적 도전입니다. 재미를 느끼려면 통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기치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상처 입을 가능성도 감수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어야 하고, 때로는 실패도 해야 하며,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오랫동안 정확히 그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게임은 콜로세움의 관중석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를 강제로 검투장 한가운데로 끌어내리는 작업입니다. 니콜라스의 심리 상태는 오만함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당혹감으로, 그리고 마침내 원초적인 공포로 곤두박질칩니다. 콘래드가 경고했던 이 섬뜩한 대사처럼.
"그들이 널 엿먹이고, 또 엿먹이고, 계속 엿먹이다가,
'아 이제 다 끝났구나' 싶을 때 진짜 엿먹이는 게 시작돼!"
신분증과 여권이 사라지고, 은행 계좌가 비워지고, 집이 압류되고, 그는 마침내 멕시코의 낯선 공동묘지 관 속에서 빈털터리로 깨어납니다. 돈, 지위, 자존심.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갑옷이 벗겨진 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국땅에 버려진 48세의 남자.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그 최악의 절망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니콜라스의 눈빛은 영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분노하고, 발버둥 치고, 살아남기 위해 달리는 그의 핏줄 속에 비로소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온한 일상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위기 한가운데서는 오히려 생생해집니다. 인간이 살아 있음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권태를 견딜 수 있는가?
자, 이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봅시다.
우리는 권태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런 약속도, 아무런 콘텐츠도, 아무런 알림도 없는 하루. 그 하루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3분을 넘기지 못하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할 것입니다. 숏폼 영상, SNS 피드, 유튜브 알고리즘.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콜로세움을 손안에 쥐고 살고 있습니다.
꼭 대저택에 사는 부자가 아니어도 인간은 익숙함 속에서 금방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반복되는 출근길, 늘 같은 사람들, 늘 같은 메뉴, 늘 비슷한 하루. 우리는 서서히 무감각해집니다. 차이가 있다면, 평범한 사람은 일상에 치여 그 권태를 잠시 잊을 뿐이고, 니콜라스 같은 사람은 그 권태를 정면으로 마주할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아도 내면은 비어 있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갖춰져도 마음은 황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게임〉이 무서운 이유는 '저런 부자도 힘들구나'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쉽게 삶의 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스와 우리의 차이는 규모의 차이일 뿐입니다.
추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비행
영화의 결말부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 콘래드가 던진 대사는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설명합니다.
"무언가 해야만 했어. 형이 완전 구제불능의 재수 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투쟁 끝에 당도한 옥상에서, 오발로 동생을 쏘아 죽였다는 거대한 비극 앞에 니콜라스는 마침내 완전히 붕괴합니다. 아버지가 뛰어내린 그 나이, 48세. 아버지가 선 그 자리. 그는 뛰어내립니다.
그것은 패배나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쥐고 흔들려했던 '통제권'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자,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유리 천장을 깨고 에어매트 위로 안착한 그 순간. 박수갈채 속에서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웁니다.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남자. 이 눈물이 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영화 속 요한복음의 구절이 이 순간을 정확히 대신합니다.
"내가 장님이었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주는 안락함, 유일한 혈육인 동생의 존재,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온기,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숨 쉰다는 것 자체의 경이로움을 볼 수 없는 장님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설계자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이 대사가 완전한 의미를 얻습니다.
"이 게임의 목적은, 게임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사기극의 유일한 목적은, 모든 것을 가졌기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한 남자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그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눈부시게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진정 살아가고 있습니까?
니콜라스의 비극은 돈이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비극은 더 이상 무엇에도 마음을 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반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삶과 멀어져 있습니다.
영화는 그 물음에 대해 거창한 철학을 내놓지 않습니다. 대신 한 남자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뒤 보여줍니다. 삶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이라고. 안전하게만 살면 살아 있는 감각도 함께 줄어든다고. 진정으로 권태를 이기는 방법은, 완벽한 통제라는 환상을 버리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모든 것이 연극이었음을 깨닫고, 가짜 웨이트리스였던 크리스틴에게 조심스럽게 커피를 제안하는 니콜라스의 마지막 미소를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그가 마침내 통제된 성벽을 허물고, 통제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니콜라스가 되어 갑니다. 루틴을 사랑하고, 예측 가능한 삶을 원하고, 상처를 피하기 위해 감정을 줄이며, 과도한 효율과 관리 속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묻게 됩니다.
이게 다인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왜 분명히 잘 살고 있는데 살아 있는 느낌은 없지?
오늘 하루,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화가 났던 일들이 있으신가요?
혹은 너무 평온해서 지루함을 느끼셨나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선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지나치고 있던 삶을 다시 느끼게 해 줄 작은 균열 하나. 모든 것을 가진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도 결국 그것이었으니까요. 새로운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잃어버린 생동. 그가 끝내 되찾아야 했던 것은 재산이 아니라 자기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을 채워드립니다." — CRS
그 부족한 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