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소설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의 단편소설 '젊은 근희의 행진'에서, 북튜버 근희가 언니 문희에게 남긴 편지 한 대목입니다.
약속할게. 절대로 벗방 안 할게. 하지만 언니가 말했듯 ‘걸레들이나 입는 옷’을 입고 방송은 계속할 거야. 나는 내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까.
책도 아름답지만 내 몸도 아름다워. 문장도 아름답지만 내 가슴도 아름다워. 적절하게 찍힌 마침표도 아름답지만 함몰 유두인 내 젖꼭지도 아름다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오히려 감추라는 언니가 이상한 거야. 언니는 왜 우리의 몸을 핍박하는 거야? 언니의 몸은 언니의 식민지야? 언니는 왜 우리 몸을 강탈의 대상으로만 봐?
나는 언니가 좋고, 언니도 속으론 나를 좋아할 텐데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편견이라는 게 너무 슬퍼. 언니, 사람한테 걸레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언니가 그런 말 할 때마다 누가 들을까 봐 무서워. 언니가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게 싫거든. 내 언니니까 나만 미워할 수 있어.
소설 속 동생 근희의 이 당돌한 항변은 단숨에 폐부를 찌릅니다. 가족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보수적인 K-장녀 문희의 눈에,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책을 읽는 동생의 ‘북튜버’ 방송은 수치스럽고 경악스러운 기행입니다. 문희는 동생을 향해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그 천박함을 꾸짖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근희의 선언입니다. 내 몸은 억압받아야 할 식민지가 아니며, 자본주의의 변방에서 나침반 없이 생존해야 하는 청년이 선택한 가장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무기라는 것입니다.
근희의 이 서늘한 외침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묻게 됩니다. 과연 자신의 몸과 매력으로 돈을 버는 것은 비난받아야만 하는 일일까요. 타인의 욕망을 자극해 화폐를 획득하는 행위는 어디까지가 정당한 노동이고, 어디서부터가 타락일까요?
우리는 어떤 몸에 박수를 보내왔는가?
문희는 근희의 방송 의상을 보고 '걸레들이나 입는 옷'이라고 말합니다. 근희는 가슴이 보이는 옷을 입고 책을 소개하는 북튜브를 운영합니다. 책이라는 고상한 콘텐츠와, 노출이라는 자극적인 외양 사이의 모순이 문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 사회가 이 불편함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르게 처리한다는 점입니다.
화보집을 내는 아이돌 여성은 '섹시하다'는 찬사를 받습니다. 드라마에서 베드신을 연기하는 배우는 '열연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수영복 화보를 찍는 스포츠 스타는 '몸 관리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BJ가 비슷한 수위의 노출을 하면 '벗방'이라 불리고, 거기에 돈을 버는 구조가 결합되면 '몸을 파는 것'이라는 언어가 따라붙습니다.
몸은 같습니다. 노출의 수위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붙이는 이름은 전혀 다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소속사의 유무인가요? 스크린과 스마트폰 화면의 차이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속한 계층과 교육 수준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 판단인가요?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선은 어디에 그어져 있는가?
조금 더 불편한 질문들을 꺼내보겠습니다.
아프리카TV BJ와 연예인은 무엇이 다른가요? 연예인은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관리된 이미지 안에서 몸을 노출합니다. BJ는 혼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을 직접 운용합니다. 전자는 시스템 안에 있고, 후자는 시스템 밖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도덕적 우열을 만드는가요?
업소 종사자와 BJ는 무엇이 다른가요? 많은 사람들이 '성행위 유무'를 그 경계로 삼습니다. 실제 성행위가 없으면 괜찮고, 있으면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성행위가 없는 노출은 허용되고, 성행위가 있는 것은 비난받아야 한다면 — 우리가 비난하는 것은 결국 성(性) 그 자체가 아닌가요?
AV배우는 어떤가요? 그들은 직업으로서 성행위를 촬영합니다.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고, 카메라 앞에 섭니다. 이것은 비난받아야 하는 일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 비난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성행위를 직업화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행위가 영상으로 유통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인가요?
저는 이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긋는 기준이 도덕이나 논리가 아니라, 감정과 계급 감각에 기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허락된 노출'과 '허락되지 않은 노출'을 가르는 것은 어쩌면 윤리가 아니라 권력일 수 있습니다. 어떤 몸은 무대 위에 오르고, 어떤 몸은 골방에서 카메라 앞에 혼자 섭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이 아니라, 자본과 기회와 운입니다.
몸으로 돈을 번다는 것
몸으로 돈을 버는 일 자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운동선수는 몸으로 돈을 법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무용수도 몸으로 말합니다. 배우와 모델도 몸을 통해 자기 일을 합니다. 가수와 아이돌도 몸의 움직임과 이미지로 대중을 만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직업이라 부릅니다. 넓게 보면 거의 모든 노동은 몸을 씁니다. 손을 쓰고, 허리를 쓰고, 목소리를 쓰고, 표정을 쓰고, 시간을 씁니다.
그런데 유독 어떤 몸의 노동은 쉽게 천박하다고 불립니다. 특히 성적 매력과 가까워지는 순간, 사람들은 갑자기 도덕의 심판자가 됩니다. 노동이나 직업 대신 '타락'이나 '몸을 판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性)이 다른 노동보다 본질적으로 더 신성한 영역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성에 유독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해 온 역사적 관습이 있는 것인가요?
언니의 몸은 언니의 식민지야? 언니는 왜 우리 몸을 강탈의 대상으로만 봐?
이 문장이 날카로운 이유는, 몸을 '위험한 것', '지켜야 할 것', '빼앗길 수 있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문제로 삼기 때문입니다. 몸을 긍정하고, 몸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몸을 직접 운용하겠다는 선언 — 이것이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근희의 질문은 그 지점을 찌릅니다.
몸으로 돈을 버는 모든 일이 다 자유롭고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난, 불안정한 노동, 외모 중심의 사회, 여성에게 주어지는 좁은 기회, 플랫폼의 알고리즘, 남성 중심의 소비문화가 한 사람의 선택 안에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정말 자유롭게 선택했는가?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너무 좁아서 그 길로 밀려난 것인가? 그 일을 하며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는가? 그 몸이 소비된 뒤에도 그 사람은 여전히 한 인간으로 존중받는가? 비난은 너무 쉽습니다.
“왜 그런 일을 해?”라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자주 비겁합니다.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왜 누군가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가장 현실적인 길이 되었는가?”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모든 선택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 필요, 사회적 압력,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구조 안에서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어느 정도 조건 지워져 있습니다. '자발적 선택'이라는 말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조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선택을 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비난의 화살이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로만 향할 때, 우리는 잘못된 곳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근희가 옳고, 문희가 틀렸는가?
몸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과, 몸에 관한 모든 것이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근희가 인스타 사기를 당해 사라지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플랫폼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때문에, 근희는 착취당합니다. 이것은 근희의 선택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근희가 살아가는 세계가 근희에게 충분히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몸의 상품화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선택을 한 사람이 착취당하지 않을 구조가 있는가?', '그 선택 이후에도 안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포르노 산업에서 배우의 동의와 권리가 보호되는가? BJ를 상대로 한 사기와 디지털 성범죄가 제대로 처벌되는가? 플랫폼 자본은 창작자의 신체 이미지로 수익을 내면서 그 창작자를 보호하는가?
문희의 불안은 편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문희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근희에 대한 혐오어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걸레들이나 입는 옷'이라는 말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근희의 선택을 비난하는 언어가 아니라 근희라는 사람을 등급 매기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버리는 것과 경계를 허무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삶을 사는 사람을 혐오어로 지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선입니다.
'많관부'라는 댓글의 무게
소설의 끝에서 문희는 근희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합니다. 그리고 댓글을 답니다. '많관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문희는 세상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몸이 얼마나 쉽게 공격당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한 번 찍힌 이미지가 얼마나 오래 따라다니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남의 생을 얼마나 가볍게 씹고 버리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문희는 동생을 보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좋은 말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겁이 많은 사랑은 자주 화를 냅니다. 무력한 애정은 자주 통제가 됩니다. 걱정은 때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문장으로 도착합니다. 문희는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동생을 지키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이 먼저 동생에게 폭력적인 말을 던졌습니다. 이 아이러니가 아픕니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가족에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선을 넘고, 걱정한다는 이유로 모욕하고,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상처를 줍니다. 문희가 정말 두려워한 것은 동생의 몸이었을까요? 아니면 동생을 향해 달려들 세상의 시선이었을까요? 혹은 그 시선을 막아낼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이었을까요. 저는 문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희의 불안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근희의 편에 서고 싶다가도, 문희의 불안을 버리지 못합니다. 문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 뒤의 공포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근희의 당당함이 좋으면서도, 그 당당함이 놓인 세계가 무섭습니다.
문희가 근희를 완전히 이해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근희의 방송 방식에 동의하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희는 이해 대신 응원을 선택했습니다. 동의 대신 공존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걸레와 예술가 사이'의 질문에 내놓는 대답인지도 모릅니다.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여전히 모릅니다. 어쩌면 그 선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고, 시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해서, 선 앞에 선 사람을 혐오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희의 편지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문장은, 몸의 아름다움을 선언한 구절이 아닙니다. 이 문장입니다.
언니가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게 싫거든. 내 언니니까 나만 미워할 수 있어.
근희는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언니가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모순이 사랑입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동의하지 못해도, 그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상처받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 — 어쩌면 우리가 이 복잡한 질문들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그것인지 모릅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많관부'를 댓글로 달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