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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6. 2021

가짜감정

다른 사람이 자주 거슬리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거슬리는 감정이 하찮은 것 같지만, 실제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 거슬린다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어떤 사람이 거슬렸다면 마음속의 뭔가가 건드려진 것이다. 거슬리는 감정은 어쩌면 두려움, 외로움, 열등감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즉, 거슬림화은 표면감정이고, 두려움과 외로움은 이면감정이다. 그런데 거슬리는 감정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궁극적으로 내 안의 수치심에 이르게 된다. 이를 심층감정이라고 한다.

→ 내가 거슬리는 사람은 나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사람이다.


수치심이란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해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 수치심!


타인지향성의 사람들은 타인의 성공에 예민하다. 다른 사람이 성공하면 자신이 못난 것 같고 실패하면 자신이 괜찮은 것 같다. 즉, 비교에 의한 열등감과 우월감이 생긴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비교하는 심리, 감정


경쟁을 하면 사람들 간의 정서적 만남이 어려워진다. 정서적 안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주고 받아들여줄 때 경험된다. 경쟁은 상대방을 누르고 이겨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관계가 피상적이 되고 피상적 관계는 공허함, 즉 외로움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쟁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겨도 허전하고, 져도 허전하다.

→ 경재에 대한 폐해


“다른 사람이 원인 제공을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 생긴 감정은 내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마치 내 감정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큰 원인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현재 겪고 있는 감정은 내 감정입니다. 내가 그 감정을 스스로 처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 감정은 나의 것이다.


화가 나고 분노한 감정은 결국 내 것이다. 상대방의 자극에 의해서 화가 난 것이긴 하지만 상대는 자극을 했을 뿐 화가 난 것은 나 때문이다. 내 안의 분노, 열등감, 외로움 등이 건드려지면서 화가 난다. 똑같은 말을 들어도 내가 여유로울 때는 화가 덜 난다.

→ 나의 상태에 따라 감정이 다르다.


상대방이 자극한 강도가 세면 셀수록 그것은 나의 중심에 가까운 것이 건드려진 것이다.

→ 나의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그것이 무엇인가?


본인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욕먹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맷집이 필요한 일이다. 본인은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위축되는 느낌이 들겠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내적인 통찰력이 생긴 것은 크게 성장한 것이다.

→ 나란 인간에 대한 통찰. 나도 별 수 없다.


‘외로움’과 ‘함께’는 동전의 양면이다. 함께 있는 사람들도 외로울 수 있고, 외로운 사람들도 언제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

→ 함께, 또 따로...


인간은 불완전하다. 부모도 불완전하다. 나도 불완전하다. 너도 불완전하다.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작은 존재다.”라는 그렇게도 피하고자 했던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오히려 해결이 가능하다.

→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식하자.


외로움은 뼈를 녹게 한다는 말이 있다. 외로운 사람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쉽게 넘어간다. 남녀관계라면 쉽게 성관계를 하고 동성인 경우에는 서로 밀착된 관계를 갖는다. 밀착관계는 단순히 친한 관계와 다르다. 정서적으로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경계선을 유지하기 어려운 관계다. 그래서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

→ 밀착관계의 어려움.


인격적 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비밀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친밀한 관계는 비밀을 자발적으로 얘기하는 관계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친한 사이니까 서로 비밀이 없어야 된다며 비밀을 강요하기 시작하면 인격적 관계가 아닌 강요된 관계가 된다.

→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은 모든 인간에게 있고 열등감을 추진력으로 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스스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 노력하기 때문에 열등감은 잘 조절되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 열등감의 좋은 점.


화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메시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이 잘못됐다.”는 메시지다. 다른 하나는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꿀 것이다.”라는 메시지다. 화의 사촌 감정들 역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메시지를 갖고 있다.

→ 화의 분석!


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장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감정이다. 슬픔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이 둘은 서로 모순적이다.

→ 화와 슬픔...


의존적인 사람들은 문제를 늘어놓기만 한다. 그러면 누군가 자신을 그러한 억울함에서 건져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왜 이렇게 억울한 감정이 드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눈이 자신이 아닌 외부로만 향해 있다. 누군가는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사람이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이런 억울함에서 해방시켜줄 사람이다.

→ 의존적인 사람.


구원자는 행동으로만 보면 이타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구원자들의 이타적 행동은 불안과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상대방의 괜찮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괜찮지 않은데 말로만 그러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미리 짐작하고 자신의 짐작이 맞는다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곤 상대방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신의 짐작대로 일을 처리해 상대방을 짜증나게 하거나 화나게 한다.

→ 구원자...


구원자들은 갈등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고 문제 중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러나 구원자들은 문제를 그냥 놔두면 잘못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겨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종종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려 함으로써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 내가 구원자?


많은 사람들이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자신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미움도 미움이기에 역설적으로 이미 악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국 이 생각이 악이 아니려면 악을 행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 없이 악을 미워하기만 하면 이미 그 마음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 악에 대한 새로운 시각!


자신과의 싸움이란 자신이 원하는 자기와 현실의 자기, 그 둘 사이의 싸움이다.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 나와의 싸움.


선 속에 악이 있을 수 있고 악 속에 선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O씨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악으로 치부하며 미워하고 자신을 선으로 치부하는 이유는 O씨의 마음이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 선과 악


내 안의 원하지 않는 나의 모습도 나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지금은 화가 나거나 창피할 때 훨씬 쉽게 내 마음을 조절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을 내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평안 속에 살게 된다.

→ 원하지 않는 나를 인정하자.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관을 고수하게 되면 자신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징계의 대상이 된다. 선을 행하는 집행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징계의 대상자가 된다. 그러면 마치 다중인격자처럼 자신 안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모순적 형태의 삶은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끝까지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법적 신념을 가진 자베르 경감이 자살을 하는 이유와 같다.

→ 자베르 경감이 그래서 죽었다니...


우리가 새롭게 가져야 할 가치관은 흑백논리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응징하는 교만의 세상, 양분화의 세상, 정의의 세상이 아니다. 선하다고 생각한 내 안에도 악이 있고 악하다고 생각한 상대방에게도 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의 세상, 포용의 세상, 사랑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 선과 악이 다 나의 내면에 있다.


누군가 내 감정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준다면 그 사람에게 무척 고마워해야 한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와 노력을 나를 위해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 정말 고마운 사람..


짜증이 자주 나는 사람들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고, 화가 자주 나는 사람들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이상이 높은 사람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보호본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력이 높은 사람이고, 강박적인 사람들은 실천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 나는 어떠한가?


‘나는 불완전하고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외로울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다. 그게 정상이다. 잘난 때도 있고 못난 때도 있다.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게 나다. 그래도 괜찮다.’

→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자!


*총평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기술하여 나의 감정이 어떠한지     있었다. 매일 일기를 쓰는 나는 그래도 건전한 감정의 배출구가 있어 다행이다. 앞으로 매일 일기쓰는 습관을 유지해야 겠다. 나의 감정들은 모두 소중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자. 그리고 기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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