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국제음악제와 함께하는 통영 여행기
판교에서 통영으로 왕씨와, J를 태우고 출발했다. 다른 친구 하나는 제주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부산에서 통영으로 온다고 했다. 작년에도 통영 여행을 같이 했던 제주 친구다.
왕씨는 여행 전날 저녁, 본인이 대상포진에 걸렸노라 카카오톡에 폭탄을 던졌다. 병원에도 아직 다녀오지 못했단다. 급하게 병원을 알아봐 여행 당일 우리집 근처 내과에 오픈런을 하기로 했다. 오전 8시 30분에 병원이 여니까, 8시까지 꼭 우리집에 오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여행 당일, 그녀는 8시 10분에 우리집 주차장에 도착했다. 머리는 축축하고 어딘가 엉성한채로 도착한 왕씨를 병원에 내려놓고 근처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했다. 그 동안 J가 병원 앞에 도착해 둘을 태우고 통영으로 출발했다. 탄력근무를 하는 셋은 평소같으면 눈꼽도 떼지 않았을 시간에 여행길에 올랐다. 날씨가 화창하고, 동네 아이들이 등교길 횡단보도 앞에 바글거렸다. 마음이 수런수런했다.
네비게이션은 판교에서 통영까지 4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직장인들이 만나면 으레 그렇듯, '미친거 아니야?'를 반복하며 회사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산청이었다. 홍보 판넬의 '알뜩 떡볶이'라는 단어가 오타인지, 의도한 것인지, 의도했다면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꽈배기와 산청딸기라떼를 먹었다. 이영자가 먹었다는 꽈배기는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뜨거웠고, 뜨거워하는 서로를 보는게 재밌었다.
나이가 들수록 왜 '특산물'에 마음이 설레이는지 모르겠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특산물 판매장을 지나칠 수 없었다. 감자부각, 김부각, 오미자청을 구매했다. 오미자청은 지금 집 냉장고에 있는데, 탄산수를 사서 오미자 에이드를 만들어먹을 생각이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맛이 없을 때, 여름 음료로 정말 좋을 것 같다. 특산물 판매장에서 '장희 딸기'가 '산청 장희 딸기'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2박 3일 여행 뒤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산청 상행 휴게소에 들렀다. 연근부각, 감자부각을 한봉지씩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제주 친구를 만났다. 오후 2시쯤이었다. 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일 년 마다 통영에서 만나는 우리 사이가 신기해서 친구가 뒷자리에 타는 동안 웃었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통영으로 와준 친구가 정말 고마워서 웃었다. 우리는 벚꽃이 만개한 봉수로로 향했다.
약간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빔밥과 낙지전을 시켰는데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주 출신인 J는 전주에 낙지전을 기가막히게 하는 곳이 있다며, 나중에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전라도 친구가 있으면 이런게 좋다. 삶의 지혜를 하나 내놓자면, 전라도 친구를 하나쯤 마련해두는게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점심은 실패한 대신 작년에도 갔던 찻집은 올해도 좋았다. 돌샘길이라는 곳인데, 생화와 다식을 함께 내어준다. 의외로 밀크쉐이크 맛집이라는데 왕씨는 이날 한 숟가락 맛본 쑥 밀크쉐이크에 빠졌는지 여행내내 쑥 타령을 했다.
봄날의 책방에도 다시 들렀다.
작년의 첫 통영 여행은, 민음사TV의 통영 여행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lsjXKjsjFxc)에 영감을 받아 꾸려졌다. 영상을 본 이후로 막연하게 통영에 가고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바이올리니트스 양인모의 공연이 2024년 통영 국제음악제에서 있어서 통영 여행을 마음먹게 됐다.
숙소에 돌아와 좀 쉬다가, 왕씨와 나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J와 제주 친구는 숙소에서 책을 읽겠다고 했다. J는 삼체를, 제주 친구는 작년에 나와 통영 여행에서 시작한 토지를 여행에 들고왔다.
공연은 헨델의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 였다. 가사를 번역해 가사집을 나눠줘서 좋았다. 대상포진에 걸린 왕씨는 공연 내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는데, 가사 중 주인공인 '즐거움'와 '아름다움'이 '저기 저 잠자고 있는 사람을 봐'라고 노래하는 대목에 잠깐 깨어 주인공들과 눈이 마주쳤단다. 어쩐지 둘이 손을 뻗어 객석쪽을 가르키며 노래했는데 내쪽을 가르키는 것 같더라니...
모든 티켓은 내가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의미로 좌석 등급을 한 단계씩 올려서 예매했다. 공연 예약할 당시 친구들에게 보고싶은게 있느냐, 아니면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느냐고 물어봤는데 '골라주는대로 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골라주는데로 보겠다는 친구가 내내 옆에서 졸길래 영 공연을 잘못골랐나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가시는 놔두고 장미를 꺾어라'가 공연장에 울려퍼졌다. 나중에 찾아보니, '울게 하소서'로 더 유명한 멜로디의 원작이라고 한다. 'Lascia la spina, cogli la rosa' 첫 소절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는데 이 공연에서 이 멜로디가 나올거라도 예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은 예상하고 들었을텐데, 우리는 사전 지식이 없었던 덕분에 클래식알못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왔다.
헨델 - "가시는 놔두고 장미를 꺾어라" (Lascia la spina, cogli la rosa) from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 오라토리오, HWV 46a (1707년)
공연이 끝나고 중앙시장에 가서 돌멍게와 도다리, 참돔, 광어회를 떠왔다. 제주 친구는 제주에서 사온 리몬첼로를 꺼냈다. 향긋한 레몬향이 돌멍게, 회와 정말 잘 어울렸다. J는 처음 먹어보는 돌멍게의 맛에 눈을 떴다. 해산물을 잘 못 먹는 왕씨는 비위가 상했는지 돌멍게 포장을 열어보지도 못했는데, 호기심에 작은 알을 맛보더니 곧장 육개장 사발면에 집중했다.
우리가 공연을 보는동안 책을 읽겠다던 J와 제주 친구는 수다를 떠느라 책을 한 장도 못 읽었다고 했다. 둘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 몇 년을 만난 사람처럼 수다를 떨었던 것 같았다. 나는 왕씨가 공연 내내 졸았으며, '아름다움'과 '즐거움'에게 딱 지목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느라 신이났다.
제철이라는 봄 도다리와 참돔이 먼저 사라지고, 광어만 접시에 남았다. 길고 긴 수다 끝에 다들 씻고 잠을 청했다. 여행 둘째날에는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통영 여행을 떠나기 몇 일 전에, 다른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친구들과 통영 여행을 간다고 자랑을 했는데, 그 친구들 다 시집가고 나면 너는 외로워서 어쩌냐는 걱정이 돌아왔다. 진심어린 걱정에 놀라서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불안이었기 때문이다.
가만 고민해보니, 친구들과 벚꽃철에는 통영으로 연꽃철에는 부여로 여름에는 강원도로 산으로 들으로 영화제로 음악제로 놀러다닐 생각으로 바빴다.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놀러다닐까 생각하기 바쁜 머리에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같이 여행가는 친구들과, 아줌마들의 우정은 디질때까지를 외치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배꼽을 잡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