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여행 이틀차, 한산도에 가서 이순신 장군님께 탄핵을 빌었다.
통영 여행 이틀차 아침에 일어나 J, 왕씨, 제주 친구와 함께 한산도로 가는 배편을 타러 출발했다.
배는 서호시장 앞, 통영여객선 터미널에서 출발한다. 터미널에 도착하기 전에 중앙 시장 앞에서 충무김밥을 포장했다.
배에 올라 충무 김밥을 먹기 위해 갑판 위에 평상에 앉았다. 따뜻한 국물을 종이컵으로 퍼서 아침에 언 몸을 녹였다.
충무김밥 반찬을 얼마나 많이 주셨는지, 석박지가 많이 남았다. 버릴 생각을 하는 우리 사이에서, 왕씨는 석박지를 버릴 수 없다며 품에 안았다. 그리고 한산도 제승당을 구경하는 내내 품고다녔다.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온 석박지는 숙소에서 컵라면을 먹을 때 훌륭한 반찬이 되어줬다.
여행 이틀차는 4월 3일이었다. 선실에 있는 티비에서 4.3 희생자 추념식이 방송되고 있었다. 티비를 보며 '오늘이 4월 3일이네' 했더니 제주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산도에 도착했다. 작은 포구에서 제승당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름답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의 수군을 지휘했는데, 그 삼도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란다. 마침 제주 친구는 경상도 출신, J와 왕씨는 전라도 출신, 나는 충청도 출신이다. 이렇게 충무공 클럽이 결성됐다. (나중에 추미애의 추, 앙자님의 앙이 더해져 충무공 추앙 클럽이 됐다. 왜 왕자님이 아니라 앙자님인지는 이전 글을 보면 된다.)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모셔져있는 곳에 도착해서는 향을 피웠다. 나라에 왜적이 많으니 이제 통영에서 남쪽 말고 북쪽을 바라보셔야 한다는 말과 함께, 내일 탄핵을 부탁한다고 빌었다. 그렇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은 헌재에서 탄핵 선고를 하는 날이었다. 한참 전에 여행 계획을 했으니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헌재의 선고가 밀리고 밀려 졸지에 여행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헌법재판소가 결정하게 되었다. 뜻이 같은 넷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번에도 장군님이 나라를 살려주시겠냐고.
돌아오는 길에는 고양이를 만났다. 애교가 많은 고양이었는데, 돌봐주시는 분이 '젊은 처자 네 명이 둘러싸고 예뻐해주네~ 호강하네~'하며 지나가신 것을 보면 수컷 고양이인 것 같다. 친구가 고양이 셀카도 찍어주었다.
한산도 포구부터 제승당을 둘러보기까지 보통 한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다들 그정도로 생각하고 배편을 예약하는데, 어쩐지 우리는 더 걸릴 것 같아 두시간 간격을 두고 배를 예약했다. 그 덕에 여유롭게 둘러보고, 사진도 찍었다.
돌아오는 배편에서는 정치 얘기를 많이 했다. 20대엔 술집에서 고래고래 정치 얘기로 싸우는 중년 아저씨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30대가 되고 이제 정치를 외면할 수 없게 됐다.
작년 10월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탄 이후 친구들과 한강 작가 작품 읽는 모임을 시작했다. 여기에 제주 친구, J, 왕씨가 포함되어 있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중간에 계엄이 터져 굉장히 시의성 있는 모임이 되어버렸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우리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슴이 뜨거웠다. 종종 독서모임 장소가 탄핵 시위 장소로 결정되기도 했다. 왕씨와 J와 나는 국회 담벼락 아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방석 하나를 나눠 앉아 서로에게 핫팩을 터트려 주고, 단 것을 나눠먹고, 시위 구호를 외쳤다. 이런 사람들이 모였으니 여행 내내 나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김치 없이 못 살아 정말 못 살아'를 외치며 내 나라 버리고 이민갈 수 없고 고쳐서 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산도에서 돌아와, 제주 친구가 현지인에게 추천받았다는 카페에 갔다. 빵 장식이 매우 화려했는데, 과일이 올라가있다는 점에서 할미 입맛인 우리 모두를 만족시켰다. 얼마나 만족했냐면, 여자 화장실에 'Women, Sexy'라는 이상한 문구를 비웃으면서도 우리는 재방문을 다짐했다. (남자 화장실에는 'Men, Wild' 라고 적혀있었다.)
중앙시장으로 이동해 꿀빵과 유자빵을 구입했다. '거북선 꿀빵'이라는 곳이었는데, 유자빵이 정말 맛있어서 인터넷으로 시켜먹을 예정이다.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는 통영 국제음악당 바로 옆에있는 스탠포드 호텔에 묵었는데, 의외의 혜택이 많이 있었다. 스탠포드 호텔 투숙객은 국제음악제 공연에 20% 할인이 되고, 국제음악제 공연을 보는 사람은 스탠포드 호텔 식당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1층에 있는 식당이 가격대도 괜찮고 음식도 맛있었다. 해산물을 잘 못 먹는 왕씨가 여행 내내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는데, 호텔 레스토랑에서 비로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호텔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화장실 하수구 냄새가 올라온다는 건데, 프론트에 문의하니 방을 바꿔주었다. 아마도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 것 같다. 방을 바꿔주면서 사우나 쿠폰도 줬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다녀온 부지런한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 해수라 물이 부드럽고 어메니티와 수건이 다 구비되어 있어 정말 편리하다고 했다. 비치되어있던 때타올이 감명깊었는지... 다녀오자마자 단톡방에 때타올 구매 링크가 올라왔다.
공연은 2025 통영국제음악제 - 시네콘서트: 호프만의 이야기, 2025 통영국제음악제 - 체임버 나이트를 보았다.
첫 번째는 호프만의 이야기라는 무성 영화를 상영하면서 그에 맞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공연이었는데, 예전에 무주 산골 영화제에서 찰리 채플린 영화와 함께 선우정아가 노래를 불러준 공연이 생각나 예매했다. 영화는 호프만이라는 주인공이 경험한 3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구성이었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J와 제주 친구, 그리고 나는 영화의 인과관계를 끼워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건 왜 그런거래?', '이게 먼저야, 저게 먼저야?' 대화가 끊임없이 오갔다. 왕씨는 이 공연도 졸았기 때문에 옆에서 머쓱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두 번째는 피아노, 호른, 바이올린 공연이었다. 공연은 늦은 저녁에 끝났다. '그 언니는 호른이 퍼스널 컬러더라!' 외치며 공연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호텔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어쩐지 음대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공연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셨다. '호른이 퍼스널컬러다'라고 외친것이 어쩐지 약간 부끄러워지는 대화였다. 객실에 돌아와 아무것도 모르고 공연 보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며 키득거렸다.
숙소에 돌아와 제주 친구가 사온 제주 소주와 함께, 꿀빵을 산 김에 둘러본 중앙시장에서 구매한 딸기 한 다라이, 꿀빵, 육개장 사발면, 석박지 등 근본 없는 안주들을 꺼내놓았다. 와중에 시나몬이 가루가 들어가는 짜장라면을 사온 왕씨는 근본 없는 중의 최고 근본 없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녀가 이 글을 보지 말아야 할텐데...)
오늘 공연도 다 졸아버린 왕씨가 먼저 잠들고, 우리도 하나 둘 잘 채비를 했다. 내일의 마지막 여행을, 산청 상행 휴게소에서 살 부각을, 윤석렬의 탄핵을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