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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Feb 28. 2021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박완서 작가의 10주기 기념으로 나온 에세이집이다. 10주기 기념으로 여러 권의 책이 새로 엮이거나 개정되어 나오기에 이것 말도고 몇 권을 더 구매 했다. 아래 민음사에서 나온 책은 특별판으로 만들어져 현재는 품절이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세계사, 2020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작가정신, 2019 개정판

『지렁이 울음소리』, 민음사, 2021

『기나긴 하루』, 문학동네, 2012


    퇴사를 전후로 몇 주간 문장을 읽지 못했다. 책을 읽어도 글자 위로 눈만 지나가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다. 퇴사 이후에 몇 일 간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몇 일 동안은 부모님 집에 내려가 먹고 걷고 많은 말들을 토해냈더니 좀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울상인 나를 두고 '그 몇 일 책이 안 읽힌다고 불안해하다니 샌님이다'고 동거인이 일침을 놓았었는데 이제야 그 말을 다시 생각하며 웃게 되었다.


    아래에는 책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부분 중 일부를 적어보았다.




p32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작용처럼 우선 자비심 먼저 발동하고 보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이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목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다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다. 정신을 깜빡 놓고 있으면 호구 잡히기 십상이라는 생각을 나도 한다. 관광지에 가서 망고를 하나 살 때에도 천 원이라도 더 내는 것일까 안달복달하다가 많은 행복을 놓쳤다. 똑부러져야 한다, 현명해야 한다 배웠고 얕은 경험으로 남에게 가르치듯이 말도 많이 했다. 이제와 박완서의 문장을 만나니 아차 싶고 부끄럽기만 하다. 지나간 말들을 주워담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p181
올해부터 나도 세배 오는 손자들 키나 재볼까. 해마다 키를 재보고 잘 먹고 무병해서 키가 많이 자란 놈을 칭찬해주는 할머니가 성적부터 묻고 안달을 하는 할머니보다 훨씬 귀여울 것 같다. 젊은이가 들으면 어느새 망령 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귀엽게 늙고 싶은게 새해 소망이다.

박완서 작가도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니, 이 글이 꽤 오래전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중간에 안경을 걷어올리고 눈도 몇 번 문질렀다. 지금 당장 트위터에서 알티 12.4k, 마음 10k를 받은 펄떡이는 문장을 건져올린 것 같다. 귀엽게 늙는 것은 무엇일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는데, 아주 어려운 경지라는 결론만 났다. 내가 아는 한 귀여운 할머니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작품 안에 심시선씨 밖에 없다.


p252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p264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醜가 없다면 미美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이 서 있는 사람, 눈에 욕심이 드글드글 고인 사람,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평생 살 건가'하고 생각한다. 하기는 박완서 작가의 말대로 그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작가 책에 대한 감상이 브런치의 첫 글이 되어 아주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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