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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미 Mar 01. 2021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짧은 소설 (콩트집)


책을 들면 가장 먼저 표지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그 다음에는 책 뒷면의 추천사를 읽는다. 좀 읽기가 꺼려지는 책이더라도 추천사를 읽다보면 일종의 영업에 넘어가 잘 읽어봐야겠다는 힘이 솟기 때문이다. 이 책은 뒷면을 보자마자 빵 터지고야 말았다. 추천사를 쓴 작가들이 다들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라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의 추천사를 이렇게까지 많이 모아놨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 중 몇 개를 적어보자면 이렇다.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면, 나는 늘 박완서 선생님을 떠올린다. _ 강화길

박완서 소설가는 한국어로 소설을 읽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읽힐 것이다. _ 정세랑

막막하고 두려워 숨이 턱 막힐 때 선생님의 문장들을 손끝으로 짚어가며 읽는다. _ 조남주


    옆에 앉은 동거인에게 추천사들을 연극톤으로 크게 읽어주었다. 글을 쓴 작가에 대해서야 어느정도 알지만, 추천사를 쓴 사람들의 이름이 이렇게나 많은데 다 아는 작가라니 놀랍고도 반가워하며 같이 웃었다. 책을 읽는 유쾌한 시작이었다.


    웃으면서 시작했으나 책의 내용은 썩 즐겁지 않았다. 어떤 장에서는 내가 후남이가 됐다가, 어떤 장에서는 상철이가 됐다가하며 남김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읽으면서 가장 놀랍고도 슬픈 사실은 1931년생 박완서 작가가 쓴 이 콩트들이, 2021년 현재의 현실을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장을 만날때면 책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 쏟아놓고 싶은 나의 경험들이 안에서 울컥울컥 솟았다.




p92
    "까불지 말고 하던 얘기나 끝마쳐. 김승옥의 「야행」이 어쨌다는거 거야."
   "자기 그거 안 읽고도 어디 가서 읽은 척할까 봐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 거기 이런 얘기가 나와요. (중략) 그래서 맞벌이를 해야겠는데, 이 여자의 직장은 은행인데 은행에선 기혼 여성을 안 쓰는 거예요. 청첩장은 곧 사표가 돼야 한단 말예요. 「야행」의 대강의 줄거리 끝."
    "싱겁긴. 그 얘기가 뭐 그리 대단한 얘기라고 그렇게 열을 올려."
    "고마워서 그래요. 내가「야행」이 쓰여진 시대 배경과 동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게. 그 여자보다 내가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게."
    "후남인 참 감사할 거 많아서 좋겠다. 언젠 자기 할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마구 감격하더니 언젠 또 자기 어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울먹이더니 이젠 또「야행」의 주인공하고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렇게 감사해? 꼭 횡재한 사람처럼 입을 못 다무니······."

이 책의 1쇄가 1995년이다. 그러니까 이 콩트가 쓰여진건 그보다 좀 전이겠다. 나는 회사 생활을 2016년에 시작했으니까 이 책의 1쇄가 나오고 약 20년 뒤에 회사에 들어갔다는 셈이 나온다. 황당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 안 다니니까'같은 이야기를 예사로 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그 당시 팀장이 나와 내 또래의 다른 여사원을 붙들고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던졌던 것인데, 머리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이런 이야기를 만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수면 위로 튀어오른다. 정작 이 말을 뱉은 사람은 자기가 이런 말을 했었나 기억도 못 할 것이라는 점에서 아주 징그럽다.

    깃털처럼 가볍게 말한 문장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 안 다니니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입에서는 가볍에 나왔을지언정 나에게는 아주 실체를 가진 무언가로 들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회사를 예사로 그만둔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래에서 승진을 할 수 있을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길 리가 있을까? 승진과 프로젝트는 커녕, 성희롱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후남이처럼 할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고, 어머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고, 또 박완서 작가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지만 지금의 나라는 여자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이 이야기가 현재진행형이 아닌 시점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p99
견딜 수 없는 건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애걸이었다. 이 두 늙은 여자들은 후남이가 이번 일로 남편이나 시집 식구 눈에 나 시집을 못 살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중략) 그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네가 빨리 사표를 내서 기철이를 서울로 불러오도록 애원을 했다. 실상 후남이를 지금만치나 줏대 있는 여자로 키워준 건 경숙 여사였다. 아들을 못 낳아 남편을 빼앗긴 한을, 외딸은 아들 못지않게 떳떳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걸로 달래면서 산 경숙 여자의 이런 애원은 후남이에게 있어서 배신처럼 뼈아픈 것이었다.




내 다음 세대 여성들에게는 이 책이 그저 역사의 기록쯤으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이 책 표지에는 '박완서 짧은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콩트집이다. 콩트는 작품의 길이가 단편소설보다 짧은 서사양식을 뜻하는 단어로, 200자 원고지 30매 내외의 짧은 분량의 소설을 엽편소설 또는 콩트라 한다. 사전에는 '인생의 한순간적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적절히 묘사한 소설로서, 사건의 전복적 결말인나 대화의 운행이 매우 지적이고 기지에 차 있어 놀라운 효과를 유발한다. 이야기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자마자 급전하여 결말에 이르는 수법도 간결한 처리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경쾌하며 언제 도달했는지도 모르게 휘몰아치듯 결말에 도달하여 내용은 둘째치고라도 순수하게 읽는 재미가 있다. 소설 하나 하나가 짧으니 읽는 시간을 내기 힘든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무거운 글을 읽기에는 지쳐 재미있는 독서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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