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힘- 고슴도치야, 쥐돌아! 도와줘!
첫째 닉이 유치원생이 된지도 어느덧 한달이 훌쩍 지나고 적응할만한 하니 가을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러기 전 이번주 목요일 늦은 오후, 좀처럼 울리지 않는 핸드폰 벨이 울리기에 봤더니 닉의 선생님이었다. 받으려던 찰나에 전화가 끊겨 후다닥 다시 걸어보니 조금 갑작스럽지만 금요일 오늘 오전에 수업을 잠시 참관하러 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둘째 노아가 같이 오면 부산스럽기 때문에 어딘가에 맡겨야 했는데, 다행히 시아버지께서 오전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천성이 어디 가서 부끄러움 타는 적도 없었고,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딱히 어려워하는 게 없는 성격인데 이상하게도 아이들 일만 보려면 묘하게 긴장되고 작은 일도 그렇게 떨릴 수가 없었다. '오라니까 가야지, 그것도 시간 딱 맞춰서! 하지만 어쩐지 떨려오는구나... 다른 아이들은 1년 정도 사립 유치원을 다녔던데, 우리 닉만 엄마 아빠가 태평해서 그런 생각을 못했던 건가 미안하기도 하고..'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 유치원 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ㄱ자모양의 복도가 있고 오래된 빌라인 건물 안에는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보였다. 본 교실 앞에 있는 작은 별실 겸 탈의실에서 닉과 다른 친구 한명, 그리고 트루트만 선생님 셋이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사실 공간은 협소했다. 그렇지만 인원도 고작 셋. 마치 집에서처럼 바닥에 편하게 앉아 바구니들을 집삼아 고슴도치 가족과 쥐돌이 가족들이 같이 놀기도 하고, 때론 누가 아프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이곳은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과는 눈인사만 하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닉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닉은 놀이에 몰입해서 엄마가 들어온 것마저 모르고 있었다. 이후에 나의 존재를 알아챈 뒤에도 와서 쓰윽 한번 웃고 손등을 쓰다듬고는 다시 인형극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이후 고슴도치와 쥐돌이 가족들에게는 많은 시련들이 닥쳤다. 주로 시련을 가져다 준 사람은 닉이었는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이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아이들이 그 해결책을 마음에 들어하면 상황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지난번에는 그 문제가 고전적이지만 "늑대의 출현" 이었다고 한다. 21세기의 일상생활에선 상당히 귀한 몸이 된 늑대이지만,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언제라도 현관문을 두드리며 "엄마가 왔단다, 문 좀 열어다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인 듯 하다.
에이~ 뭘 그런걸 무서워 해.
내 원래 성격이면 백번이고 하고 말았을 그 말을, 오늘날 인터넷과 텔레비젼 그리고 책에서 보고 듣고 읽은 수많은 육아상식으로 내뱉지 않고 집어 삼켰었다. 투르트만 선생님은 당연히 그런 말은 하지 않으신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극복하고, 특히 닉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놀이를 매개로 그걸 풀어내는 게 그 당연한 말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 단지 육아 때문이 아니라 스위스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아! 이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지? 기분이 별로니까 오늘은 그냥 완전히 신경끄고 하루를 보내야 겠다. 이런 식이었던 적이 가끔 있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을때 날 보고 있던 아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여전히 내 머릿 속에는 뒤엉킨 생각들이 많았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하나씩 해결하자고 했다. 사실 딱히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없고 방학동안에 닉과 할 수 있는 활동에 아이디어를 주겠다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면서 적응하는 거라고.
참관은 한시간 만에 끝나고 닉이 유치원을 끝마치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선생님은 웃으며 물었다. 아마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어서였을 것 같다.
"여기서 한 시간동안 계실래요, 아니면 나가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참관하는 동안 생각했던 것도 정리한다는 핑계로 부리나케 나갔다. 혼자만의 한 시간!! 이건 황금같은 기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만끽해야만 했다. 후다닥 나가서 서점에서 책 한 권을 골랐다. Der Hundertjährige, der zurückkam, um die Welt ze retten(세상을 구하려고 돌아온 100세 노인). 제목과 작가 Jonas Jonasson 을 곱씹어 보니 어, 이거 읽고 싶었던 책인데(사실은 한국어로, 한국어 제목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다.) 독일어지만 이게 어디냐 싶어서 냉큼 집었다.
그리고 MIGROS 레스토랑으로 직행. 좋아하는 일을 할때 정말 좋은 점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모든 것은 완전히 내 몸과 머리에 자동화되어있기 때문에 집안일을 할때처럼 버벅거리지도 않고 딱히 망설이는 것도 없이 마치 누가 갖다놓은 것처럼 커피와 책 한권을 앞에 두고 앉았다.
이 한시간이 나에게 가져온 에너지는 엄청났다. 오후 내내 아이들과 놀 수 있었고 닉은 공원 저쪽 분수대 노아는 공차기를 하며 양쪽으로 제 각각 놀며 이쪽 저쪽을 뛰어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심도깊은 대화와 한시간의 자유는 어쩐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근래의 일상에 따뜻한 모닥불처럼 내 몸에 온기를 가져다 줬다.
이제야 아이 둘을 재워놓고 혼자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와보니 (물론 방금 둘째 노아가 자다가 울기 시작해 젖을 물리고 왔지만) 놀이라는 게 나에게도 그렇게 중요했던 거다. 어른이고 자신이 원하는 걸 스스로 안다고 생각 혹은 착각하는 나이인데도 내가 즐거울 수 있는 활동은 정말 소중했다. 최근의 나는 그런 나의 욕구에도 닉의 욕구에도 무심했던 것 같다. 스스로 원하는 걸 몰랐다는 것이 사실 꽤나 충격적이었다.
재미라는 게 삶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활력인데 왜 그렇게 차갑게 대했을까?
꼭 어딘가를 여행하고 새로운 걸 체험해야 재미있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2주간에 방학. 난 대체 애들 데리고 뭐하지? 하고 한숨쉬고 있었는데 운좋게 참관을 방학 전에 할 수 있어서 긍정적인 시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애엄마 마음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선생님 조언대로 애들 모르게 불안하도록 노력할 뿐이지..
위 닉, 아래 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