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스 Oct 10. 2018

집순이의 루체른 나들이

Feat. 교통 박물관, Chilbi


한국사람이 없고 있다가도 대부분 돌아가는 동네에 사는 나에게 루체른 나들이는 언제나 특별하다. 평소에는 거의 듣지 못하고 사는 한국어도 듣고, 닉이 한국어로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잠시 담소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남편은 못 알아듣는 척 옆에서 웃고 있지만 한국여자와 결혼해 산지 어언 6년에 한국어가 모국어인 아이 덕분에 눈치코치 한국어가 수준급인 데다가 시험이나 업무량이 적을 때는 출퇴근 기차 속에서 한국어 공부도 했었던지라 대화가 끝난 뒤엔 항상 본인이 이해한 내용을 되묻는다.  


내가 사는 칸톤(스위스의 행정구역 단위)이 아르가우라서 루체른은 바로 옆 칸톤이다. 지도상 맨 위 중앙에 있는 취리히와 바젤 사이의 칸톤이다. 거기에 남쪽에는 루체른 인접, 나름 어디든 가기 좋은 위치이지만 집순이인 나에게 크게 의미는 없다.


스위스의 주(칸톤). 출처: 위키백과


루체른은 가까워서 사실 칸톤 취리히와 더불어 아이가 없던 시절에는 쉽게 갈 수 있던 동네 중 하나였지만, 두 아이 엄마이자 장롱 면허증 소지자로서- 그조차도 국제면허증 발급을 받지 않아서 스위스에서 운전을 하려면 다시 면허를 따야 한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 트램을 굳이 갈아타면서 어딘가에 가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워져 버렸다. 물론 집순이인 나의 성향 탓도 있을 것이다. 어딜 굳이 가고 싶지가 않은 사람이라...  


문제는 닉이 만 다섯살이 되면서 아무래도 좀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 것 같은데, 늘 동네에서만 머물고 딱히 참여하고 있는 활동이 없기 때문에 이 넘치는 기운과 아이디어를 풀어낼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겠는가, 나도 남편도 우리는 환상의 집순, 집돌 커플이지만 슬슬 무거운 몸을 움직여 여기저기 다닐 수 밖에...


교통박물관 내부의 놀이터같은 공간. 원격 자동차와 배.
아이들이 참 용감하게 붕붕 뛰며 공중제비를 하더라.


특히 루체른의 교통박물관은 닉의 대부이자 남편의 절친이 다섯살 생일 선물로 데려가 주었는데, 그 이후 정말 행복해 하는 닉의 모습에 이 열기가 식지 않았을 때 다시 가보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만 두 살짜리 노아는 뭘 알겠냐는 생각으로 주로 집에서 나와 함께 강제로 쉬었었는데, 그것도 생각해보니 쉬고싶은 내 핑계인 것 같아서 이번엔 가족 네 명 전원 나들이에 나섰다.


 흔한 자동차 덕후인 노아는 간만에 가족 모두가 가는 기차 나들이에 잔뜩 들떴고, 애들이 배가 고프면 항상 난리 부르스가 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된 우리는 계속 애들에게 뭔가를 먹이느라 바빴다. 생각해보니 정작 나와 남편은 쫄쫄 굶은 것 같다.



루체른 역에 도착하니 마침 가을 축제 Chilbi(킬비와 힐비 중간 발음 정도다. Ch 흐-는 스위스 독일어 특유의 강한 목에서 굴리는 소리인데, 프랑스어의 r과 유사한 느낌이다. 이런 행사를 표준독일어로는 Kirchweih라고 한다.)로 광장이 가득하고 시끌벅적했다. 내내 조잘거리던 아이들이 조용해지고 눈은 휘둥그레 해져서 회전목마, 화려하게 장식된 오르골, 아이들이 들고 지나가는 풍선 등을 보느라 바빠졌다. 특히 닉은 대관람차!!를 전부터 타고 싶어했다.


날씨가 흐린데도 사람이 참 많았다.


회전목마도 안 탄다고 하는 녀석이 갑자기 웬 대관람차 타령일까? 아이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변화도 다 자라면서 겪는 과정이겠지? 갑자기 어렸을때 너무 먹기 싫었던 회와 산낙지가 생각났다. 그 싱싱한 해산물이 어린 내 코에는 왜 그렇게 비린내로만 느껴졌는지. 나중에 어른이 된 후 그 음식들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나라에 살 줄은 모르고 어린 날에는 그렇게도 튕겼었다. 사람은 그렇게 변하는 거니까. 어린 닉도 그런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일테다.


대관람차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한 나는 노아와 회전목마를 타기로 했다. 놀이공원에서 어떤 놀이기구가 제일 좋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난 역시 회전목마라고 말할 것 같다. 위험하지도 않고 예쁘니까. 타고나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고, 다치지도 않을테니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건 이런데에서도 역시 드러난다. 그렇다고 평온하고 유한 성격도 아닌데 놀이기구에 대해선 항상 이런 편이었다.


거듭 적지만 자동차 덕후인 노아는 당연히 자동차 모양에 올라탔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서의 1분을 보낸 것 같다. 2프랑의 행복. 물론 이후에 다시 더 타겠다고 난리였지만, 형과 한 번 더 타라고 아껴두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세상 떠내려가게 울며 시위했을 녀석이지만, 주위에 워낙 시선 끄는 것이 많아서 조용히 잘 마무리 되었다. 이젠 만 두살에서 세살의 아이들이 어떻게 엄마나 어른들을 대상으로 미운 세살의 각종 권법(?)을 시전하는지 알고 있지만, 닉 때에는 그걸 모르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 고집에 끌려갈 때도 많았던 것 같고, 아직도 많이 그런 것 같지만 나름 부모로서 상황을 리드하는 데에 조금 익숙해졌다.



아마 엄마와 같이여서 더 신났나보다.
2차는 형아랑 타기. 기둥에 절묘히 가려진 두 형제. 나의 사진 실력이란...



참, 교통박물관에 갈때는 루체른 역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다. 그 배에서 아마도 신혼여행 커플인듯한 한국인 관광객 두 분을 만났는데, 공교롭게 여자분이 친한 친구를 조금 닮았었다. 닉이 좋아하는 이모라서 자주 만나러 가고 싶어하지만, 친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지라 자주 보기는 역시 힘들다. 

아무튼 그 여자분의 손을 잡고,


"엄마, 나 이모를 찾았어!"

이러는데, 왜 가슴 한구석이 코옥 찌르듯 슬픈 기분이 드는지. 스위스에 살면서도 이곳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았고 각자 일로 저마다 바빠서 자주는 못 보지만, 그와 별개로 멀리 있어서 못 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어서 그 문을 열었더니, 이전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예고없이 닫혀버린 기분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달까.


한국어로 열심히 종알대며 모르는 이모의 손을 신나게 쓰다듬는 걸 보고 귀엽게 생각해 주셨는지 자두맛 사탕도 받았다. 감격스럽게도 한국에서 온 자두맛 사탕. 그 익숙한 자두향이 한참 코끝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두분 사진이라도 찍어드리고 싶었는데, 우리가 내려야 할 시간이 되어서 인사만 하고 후다닥 내려야 했다.


어쩐지 호수도 좀 애수에 젖은 느낌이다. 사실은 그냥 흐린 날씨지만.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흐린 날씨 때문이었는지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혼자였다면 노트라도 꺼내들고 뭐라도 쓰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라면 상념따윈 축구공처럼 발로 뻥 차서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이쪽 저쪽 따라 뛰어다니기 바쁠 뿐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따라다니다 보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이건 어떤 의미에선 참 다행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