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흔히들 말한다. 여행은 인생이고, 인생은 여행이라고. 각자가 생각하는 여행과 인생사이 결정적인 공통점은 다르겠지만, '매 순간이 아름다울 순 없어도, 대개 남은 기억은 아름다운 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내 인생이 여행 같기를 바라며, 오늘도 기억 여행길을 떠난다.
우리집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었다. 외가는 주로 강원도 양구를 시작으로 경기도 외곽지를 거쳐 부산의 동쪽에 주로 거주하였고, 친가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전역에 나누어 거주하였는데. 때문에 명절에 가까워 친척집을 들를 때면 지방행사 다니는 연예인 못지않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강원도 양구에 계신 외증조할머니댁에 갈 때면, 군복무늬와 같은 얼룩무늬 상자에서 어릿한 청년이 나와 아버지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할머니댁에 전화가 연결된 뒤에만 지나갈 수 있었던 기억. 경상남도 하동에 사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직접 잡은 갈치와 고등어를 회로 먹었던 기억.
이외에도 이천, 여주, 여수, 남해, 거제, 포항, 울산 등 친척집에 들러 시간을 보냈던 일들도 마냥 어렸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여행이었지만, 그야말로 전국 각지를 돌며 일을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일 년에 몇 번 없는 쉬는 날이 되면 진짜 여행을 떠나자며 일하는 동안 좋았던 곳들과 운전을 하면서 좋았던 곳들을 모두 같이 보고자 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힘든 일인 줄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고 행복해했었는데, 성인이 되어 회사를 다니고 김영하 작가의 표현처럼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시기가 되자. 그 잠깐의 시간에 가족과 여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매일 깨닫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을 전후, 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때를 꼽자면 단연 마지막 가족여행을 들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같은 순간이 다시 올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나, 그렇게도 자주 떠났던 가족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날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와 열 살 남짓도 차이 나지 않던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여느 때와 같이 아주 긴 기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앞서 경험한 아버지의 귀가 중에서도 피곤함이 손에 꼽을 정도로 느껴지던 날이었는데,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의 '출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대를 느끼셨던 탓인지 오후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아버지께서는 짐을 챙겨 '출발'을 외쳤고, 아마도 반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던 우리는 아버지의 곁에서 또 다른 여행의 설렘에 취해 따라나섰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버지께 듣기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기도 힘든 집에 당신의 공간이 없음을 느끼셨었다고 했다. 집이 좁았던 이유도 있지만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 곧 축제날이었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기 힘들었으리라.)
그날의 여행지는 강원도 고성으로 긴 시간의 운전 끝에 도착했지만, 그 당시 고성은 관광지의 느낌이 거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지역이었다. 더불어 불어오는 바람이 태풍에 못지않았음에도, 텐트를 챙겨 왔던 우리는 바닷가 한가운데 텐트 두 동을 설치하고 저녁식사 길에 올랐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저녁을 먹고 바닷가로 돌아오니 설치해 두었던 텐트는 온데간데없었고, 태풍 못지않던 바람은 태풍이 되어 잠시도 서있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숙박업소도 흔치 않던 곳이라, 불 꺼진 주변을 차로 돌기를 서너 번, 어렵게 찾은 여관에서 네 식구는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날씨로 우리를 맞이한 화진의 풍경은 지금도 운전을 하게 된다면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고성을 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다의 풍경뿐 아니라 화진포를 둘러싼 드라이브 길과 화진포성(김일성별장)을 오르내리며 볼 수 있었던 풍광은 금강산과 별장을 모두 갖고 싶었던 옛사람들의 욕심을 이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곳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가족여행에서 돌아오면 아버지께서는 또다시 돌아올 날조차 정해지지 않은 출장길을 떠나셔야 했는데, 그때가 마지막 가족여행이 되었음을 알게 된 지금.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현재로는 오고 싶지 않을 만큼. 그대로 멈추었으면 좋았을 그때. 다시는 못 올 그때가 특히 기억에 남고, 미련이 된 이유는 가족사진을 남기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 (뭘 그리 떠올리면 아쉬운 것들이 많은지. 휴)
여행은 필터가 적용되는 어플로 사진을 남기듯 조금은 흐릿한, 실제와는 다른 기억을 남긴다. 대개는 좋은 기억들이 남아서 현재를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고는 한다.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텐트가 사라져 있었던 장면', '화진포의 성을 처음 보았던 장면' 둘 뿐이지만. 분명한 순간의 주변에 채워진 흐릿한 기억들이 지금의 나에겐 가장 큰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음을 다시 돌아본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는 순간을 채우고자 오늘도 다짐한다. 앞으로도 여행은 삶처럼 꾸준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