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와 여우, 언니와 고양이
"아빠!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딸은 퇴근하여 신발도 채 벗지 못한 내게 다짜고짜 물었다. 딸의 왼쪽 눈이 커진 걸 보니 꽤나 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은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었다. 옹알이 끝내고 처음 한 말은 '아빠', '엄마'가 아닌 '이거 뭐야?' 였을 정도로 호기심이 강했다. 호기심이 생겨 궁금한 것이 생기면 딸은 으레 얼굴이 빨개졌고 왼쪽 눈은 놀란 고양이처럼 커졌다.
엄마에게도 물어봤을 텐데 아마도 엄마는 아빠가 퇴근하면 물어보라고 했을 것이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이 무척 급했나 보구나. 아빠가 신발도 벗기 전에 물어보는 걸 보니. 허허"
나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아빠 왜 말 안 해주냐고? 길들인다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딸은 손을 씻는 욕실까지 졸졸 따라오면서 알려달라고 다그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요 녀석 급하기는"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소파에 마주 보며 앉았다.
"지희야 아빠가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지 알지?"
"응"
"아빠가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가을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는데,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GS 편의점 골목에서 항상 점박이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단다. 하필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 그 장소에서 말이야."
"에잇 아빠 뻥치지 마! 어떻게 고양이가 아빠를 알고 거기서 기다려? 말도 안 돼."
딸은 아빠의 말을 믿지 않은 눈치였다.
"정말이야. 그럴 줄 알고 아빠가 지희 보여 주려고 사진 찍어놨지? 여기 봐봐"
나는 딸에게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 정말이네"
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고양이 사진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물어본 길들인다는 말을 잊어버린 듯 보였다.
"그런데 지희야 이 고양이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란다."
"그럼 누굴 기다리는 데?"
"어떤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
"에이!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빠가 이 시간에 여길 지날 때마다 어떤 언니가 이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자주 봤거든"
"그런데 왜 오늘은 언니가 안 왔는데?"
"딸은 정말 궁금한 듯 발을 동동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거야 아빠는 모르지"
"그럼 내일 그 언니 만나면 물어봐봐. 고양이가 이렇게 언니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왜 안 왔냐고!"
"그래 알았어. 내일 언니 만나면 꼭 물어볼게"
"그런데 지희야 아빠한테 '길들인다'가 무슨 말인지 물어보지 않았어?"
"아 맞다. 아빠 알려줘"
"길들인다는 것은 아빠가 보여준 사진 속 고양이처럼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란다."
"아빠 그게 무슨 말이야?"
"처음에는 그 언니와 고양이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겠지? 그런데 언니가 같은 시간에 고양이에게 몇 번 먹을 것을 주니까 고양이는 그 시간만 되면 언니를 기다리게 된 거야?"
"당연하지. 고양이는 똑같은 시간만 되면 언니가 맛있는 음식을 주니까 기다렸겠지"
아이는 신난 듯 맞장구를 쳤다.
"지희야 이게 바로 '길들인다'는 뜻이란다. 이 세상에 고양이는 셀 수 없이 많겠지? 그리고 언니 같은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 하지만 언니가 고양이를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먹을 것을 주니까 서로 길들여진 것이란다."
딸은 알 듯 말 듯한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고양이와 언니는 좋은 관계를 맺었겠지?"
나는 딸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말했다.
"그렇지 둘은 사이좋은 친구가 됐을 거야"
"그리고 고양이는 저녁 6시에 언니를 만날 수 있으니까 아마도 5시부터 편의점 앞에서 기다렸을 거야"
"맞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고양이는 행복하게 언니를 기다렸을 거야"
딸은 점점 내 이야기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언니가 오지 않았지? 고양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청 슬퍼했겠지"
딸도 슬펐는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지희야 길들인다는 것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고, 친구가 되면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단다."
"아빠 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언니가 고양이에게 저녁 6시만 되면 편의점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줬는데, 오늘은 언니가 일이 생겼는지 못 왔잖아? 그런데 언니의 사정을 모르는 고양이는 언니가 안 와서 슬프지 않았을까?"
"아마 슬퍼서 울었을 거야"
딸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것처럼 길들인다는 것은 친구 사이가 된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란다. 행복한 친구 사이를 만들기 위해서..."
"아 그렇구나. 그럼 나도 아빠에게 길들여진 거구나. 아빠가 저녁 6시에 집에 오지 않으면 나는 엄청 슬퍼지거든"
우리 딸은 천재인가 싶었다. 퇴근하면 딴 데 가지 말고 곧장 집에 들어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는 걸 보니...
사실 딸과 대화를 하기 전에 아내에게 왜 딸이 이런 질문을 하는지 물었다. 아내는 오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어주었다고 했다. 마침 오늘 읽어준 내용이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였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를 알기 쉽게 말해주려고, 실제 있었던 언니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런데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요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지만,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수천수만 명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또 하나의 소년일 뿐이야. 그러니까 난 네가 없어도 돼. 너 역시 내가 없어도 되겠지. 네가 보기엔 나 역시 수천수만 마리의 다른 여우들과 똑같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이 될 테고,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하나뿐인 여우가 되겠지.”
...(중략)...
이튿날 어린 왕자는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말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걸.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드디어 네 시가 되면 나는 마음이 설레서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언제 마음의 준비를 하면 좋을지 전혀 모를 거야. 그래서 습관이 중요해.”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