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우연히 매스컴에서 배우 차인표 씨가 쓴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라는 책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한국학과의 필수교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차인표 씨가 책을 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굴도 잘 생긴 배우가 책까지 썼구나. 참 대단한 분이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책은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옥스퍼드대의 교재로 선정됐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다행히 제가 보고 있는 전자책에 차인표 씨의 책이 있어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을 받으면서요.
작가는 1997년 한국에 오셨던 훈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로 끌려가셨다가 지난 1997년 잠시 한국에 오셨던, 작은 키에 크고 고운 눈을 가진 할머니입니다."(작가)
저도 신규교사 시절이었던 그 당시 훈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으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 차인표 씨는 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하고 비록 상상의 이야기지만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10년에 걸쳐 쓴 이야기가 2024년에 비로소 빛을 발한 이유는 차인표 씨의 이런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왜 옥스퍼드 대학교 한국어과에서 필수교재로 선정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여인이 위안부로 끌려가기까지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 과하거나 전혀 유치하지 않았습니다. 읽다 보면 '우리 한글에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들이 있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호랑이 마을, 잘 가요 언덕, 아름드리 꿀밤나무, 오세요 종, 풀피리, 연분홍 구름국화꽃, 노란 애기똥풀꽃, 새하얀 박세꽃, 진분홍 털개꽃, 노란 애기금매화, 자줏빛 두메자운"
"톡, 톡톡. 풀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들이 하나둘터집니다."
자칫 넋을 잃고 읽다 보면 뼈 아픈 이야기가 아닌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책을 읽는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호랑이 마을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던 눈은 개울가에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남긴 채 사라졌고, 잘가요 언덕 너무 호랑이 산 밑자락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분홍 구름국화꽃들로 마치 불타는 듯합니다."
"뿌려 놓은 사금처럼 백두산의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도 오늘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이 먹물을 풀어 놓은 것처럼 새까맣기만 합니다."
또한 넷플릭스의 '차인표'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 차인표처럼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내용들도 종종 나와 주인공 '순이'의 삶이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총알이 발사되는 대신 총구에서 말린 고구마 한 개가 픽 하고 나옵니다. 달려드는 육발이의 발톱 앞에 당황한 훌쩍이의 눈동자가 달걀만큼 커집니다."(육발이 호랑이에게 훌쩍이가 총구를 겨누는 상황, 훌쩍이의 꿈)
베스트셀러 소설을 여러 권 집필한 중견 작가와 같은 포스가 느껴집니다.
특히 저는 주인공 '순이'의 등장신에서 중견 작가의 노련미를 봤습니다.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는 마음 착한 순이이지만 야무지고 어른스러운 순이를 이 두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내공에 놀랐습니다.
"자기 몸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마른 나뭇가지 더미를 지게에 짊어진 한 소녀가 구경꾼들을 헤치고 마당 안으로 들어섭니다. 촌장님의 손녀딸인 순이입니다. '그만! 앉아! 어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이 세마디로 순이는 흥분한 개들을 진정시킵니다. 순이의 행동에 열한 살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조숙함이 묻어납니다."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일본인 장교 '가즈오'가 일본에 있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충성을 다하는 젊은 장교의 모습이, 전쟁이 거듭될수록 한국 침탈의 패악성을 깨닫고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괴로움을 편지로 표현합니다. 호랑이 마을에서 순이라는 여자를 만나 '조선인 여자 인력 동원 명령서'를 집행해야 하는 내용에서 일본 장교의 고민이 극에 달합니다.
"순이 씨,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 나라에 와서 전쟁을 해서 미안합니다. 평화로운 땅을 피로 물들여서 미안합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당신을 짓밟아서 미안합니다. 순결한 당신의 몸을 찢고, 그 아름다운 두 눈에 눈물 흘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짧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는 우리의 시대적 아픔과 슬픔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표현한 작가의 순수하면서도 지독한 열정이 담겨있습니다.
아마 작가 차인표 씨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들은 우리가 이곳에 마을을 만들고 정착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이 산에서 살고 있었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생각해 보게나. 사람에게 해가 된다고, 혹은 조금 불편하다고, 혹은 조금 이득이 생긴다고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설령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일지라도 말일세.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곳이네. 짐승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더불어 살 수 없는 법이야."(호랑이를 잡으러 온 황포수에게 촌장님이 한 말)
주인공 '순이'가 '용이'에게 밤 하늘을 보며 했던 말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습니다.
"용이야, 언젠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같은 엄마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28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