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귀국과 함께 시작된 또 다른 음악의 시간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잠깐의 귀국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의 우리 가족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 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에게 예상치 못한 반전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영국 런던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막상 한국에 와 보니 한국 나름대로의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었다. 이미 영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토요일마다 한글학교를 3년 정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대한 거리감도 크게 없었다. 오히려 그 당시의 나는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영국에서 사용하던 낡은 중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함께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삿짐이 워낙 많았던 탓에 부모님은 그 피아노를 영국에서 정리하고, 한국에 가면 새 피아노를 다시 사주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 뒤, 집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 부모님과 함께 동네 피아노 매장에 가게 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그날 나는 꽤 신이 나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매장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피아노 앞에 앉아 뚱땅뚱땅 건반을 눌러보며 이것저것 비교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비교라고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피아노의 음색이나 터치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아마도 단지 소리가 조금 더 마음에 들거나, 왠지 더 끌리는 피아노를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처음 들어온 피아노가 바로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새 피아노가 집에 들어왔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몇 주 정도 계속 치다 보니 어머니께서 슬쩍 나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피아노 소리가 조금 답답하지 않니?”
신기하게도 나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르게 그 피아노의 소리가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일이다. 그때의 어머니도, 나도, 피아노 음색에 대해 특별히 밝은 귀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피아노 매장을 찾아갔고, 그 피아노를 반납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선택하게 된 피아노가 바로 "맑은 소리 띵띵띵띵 고운 소리 띵띵띵띵" 광고로 유명했던 영창 피아노였다.
매장에서 그 피아노의 건반을 처음 눌렀을 때 들려오던 맑고 경쾌한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소리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어 어머니께 “이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고, 어머니도 삼익 피아노보다 이 소리가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들어온 두 번째 피아노가 바로 이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그리고 이 피아노는 이후 오랫 시간 동안 나에게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학교 연습실이나 여러 공연장을 제외하면 나는 거의 20대 중반까지 이 피아노로 연습을 했다.
나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대부분을 함께한 악기였다.
지금도 이 피아노는 여전히 잘 보관되어 있다. 나에게는 하나의 가보 같은 존재다.
조금 우리나라 이야기로 자랑을 덧붙이자면, 영창 피아노는 정말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악기였다. 지금도 영국에서 피아노 조율사분들이 집에 오셔서 관리해 주실 때마다 말씀하신다.
“이 피아노는 정말 부품이 튼튼하네요. 오래된 것 같은데도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관리를 잘한 덕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악기 자체가 매우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와 함께, 나의 한국에서의 음악 여정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부모님은 곧바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나를 등록해 주셨다.
지금도 그 피아노 학원의 기억들이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은 두세 분 정도 계셨고, 많은 학생들을 번갈아 가며 지도해 주셨다. 영국에서는 피아노 학원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방과 후 개인 레슨 형식이었는데, 한국의 피아노 학원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많은 학생들이 한 연습실에 모여 각자 연습을 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10분 정도씩 돌아다니며 지도해 주는 방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정신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또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한 연습실에 피아노 두 대를 넣어 두고 나와 다른 학생이 나란히 앉아 연습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집중해서 연습했을까 싶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것도 하나의 재미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연습 숙제장이었다. 그 연습 숙제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아서 참으로 아쉽다..
동그라미, 세모 같은 표시가 기본으로 스무 개씩 그려져 있고, 한 번 반복 연습할 때마다 하나씩 색칠을 하는 방식이었다. 다 채우고 나면 선생님께 검사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다.
물론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은 연습을 대충 하고 나와도 선생님이 자세히 확인하지 못하실 때도 있었다.
그 시절 피아노 학원에서 늘 함께했던 교재들도 아직 기억난다.
하농, 체르니, 부르크뮐러, 소나티네, 피아노 소곡집, 명곡집 등등..
한국에서 피아노를 한 번쯤 배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들일 것이다.
비슷한 연습이 계속 반복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공부를 특별히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같은 예술 분야라고 할 수 있는 미술은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미술 학원에 가는 날이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아노 학원만큼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께 늘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 놀이동산 다녀올게요!”
그만큼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이 나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돌아보면 한국의 피아노 교육 방식에도 분명 장단점이 있었다.
당시 많은 학원들은 학생들을 연습실에 오래 두고 반복 연습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세심한 관리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음악을 먼저 친구처럼 느끼도록 흥미를 만들어 주는 교육이 많았다.
하지만 그 역시 단점이 있었다. 흥미 위주의 수업이 많다 보니 기본기가 탄탄하게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한국식 기본기 교육과 영국식 음악 교육이 반반 섞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지금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감사하게 느끼는 점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두 나라의 교육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그 장점을 자연스럽게 섞어 가르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그렇게 피아노를 좋아하면서도 그때까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진지한 생각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 역시 내가 음악을 계속하도록 응원해 주셨지만, 특별히 피아니스트의 길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에게 그렇게 특별한 재능이 보였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좋아서 계속 피아노를 순수하게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부담 없이 피아노를 계속 이어가고 있던 어느 주말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소와 다름없이 거실에서 TV를 보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집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고,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옆에서 아버지의 통화를 듣고 있던 우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갑자기 크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네?!”
잠시 후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아버지에게 인도 뭄바이로 4년간 주재원 발령을 통보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순간 모두 당황했다.
다시 해외로 나갈 가능성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유럽이나 북미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갑자기 인도라니..
아버지는 어떻게든 인도 발령을 피해 보려고 설득해 보셨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몇 달 안에 먼저 인도로 떠나셔야 했고 우리가 3개월 뒤 뒤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아직 몰랐다.
이 일이 우리 가족의 삶을 크게 바꾸는 첫 번째 반전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나는 결국 인도로 갔을까?
만약 그때 인도로 갔다면, 나의 음악 인생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을까..
어쩌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 뒤에는 아직 또 하나의 반전이 남아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