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갈 뻔했던 순간
나는 그때, 아무것도 몰랐다.
내 인생이 얼마나 큰 갈림길 위에 서 있는지조차.
앞선 글에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버지의 인도 뭄바이 발령 소식을 전하며
“나는 과연 인도로 갔을까?”라는 질문을 남겼다.
이제 그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결국 인도로 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스스로 내린 선택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사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흐름이 바뀌어버린 결과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순간은, 아주 조용하지만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지점이었다.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전해진 인도 발령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부모님은 비교적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셨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정리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담담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부모로서의 책임감과 결단이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반면 어린 나와 여동생은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어리니까, 환경이 바뀌는 것에 대한 막연한 느낌만 있었을 뿐
그 변화가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먼저 인도로 떠나셨다.
초여름의 뭄바이는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졌고, 실내는 에어컨 덕분에 괜찮았지만
바깥은 결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셨고,
남은 우리는 한국에서 출국 준비를 이어갔다.
짐을 하나씩 정리하고, 다니던 학교에도 인사를 하고,
친구들과 송별의 시간을 보내며 익숙했던 일상과 천천히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분명 하나의 챕터가 끝나가고,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출국을 약 일주일 앞둔 어느 주말,
그 사건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아버지 회사 동료 가족 중 유난히 친하게 지내던 두 가족이 있었고,
그 집 아이들과 나는 마치 형제처럼 지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셋이 함께 있으면 마치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늘 붙어 다녔고,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내가 인도로 간다는 소식에 친구들도 많이 아쉬워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추억을 만들기 위해
1박 2일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그 시절 우리는 자전거에 정말 푹 빠져 있었고,
특히 일산 호수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날 역시 초여름의 더운 날씨였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신났고, 웃고 있었고, 그 순간 자체가 너무 좋았다.
중간에 잠시 쉬는 동안 어른께서
가파른 길이 많으니 보호 장비를 착용하자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더운 날씨를 이유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선택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나는 친구들과 아버님 뒤를 따라 맨 마지막에서 내려가고 있었고,
그 순간 브레이크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자전거의 중심이 무너지면서
몸이 왼쪽으로 크게 쏠렸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통일동산을 따라 길게 이어진 철조망 펜스가 있었다.
모든 일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는 그 철조망에 부딪혔고,
왼쪽 눈을 크게 다쳤다.
바닥에 쓰러진 순간, 나는 이미 알 수 있었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면 시야의 절반이 완전히 어둡게 가려진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반쯤 기절한 상태에서
계속 울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날 이후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인 분들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치료를 받으며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가기 위해 친구 집에 전화를 하셨다가
이미 남겨진 음성 메시지를 듣게 되셨다고 한다.
“지금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있다.”
그 한마디는 어머니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신 어머니는 나를 보시고 끝없이 우셨고,
충격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셨다.
인도에 계시던 아버지도 새벽에 그 전화를 받으셨다.
자다가 갑자기 들은 소식에 얼마나 놀라셨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새벽 전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셨고,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 새벽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약 1년 가까운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다섯 번에 걸친 수술 끝에 결국 망막 박리라는 진단을 받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왼쪽 눈의 시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나의 피아노 여정과 공부 등 모든 활동들이 다 중지가 되었고
인도로 향하던 우리의 계획도 완전히 무산되었다.
나는 인도를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셔야 했고,
어머니는 혼자서 나와 여동생을 돌보며
그 긴 시간을 견뎌내셨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단순히 힘든 시기가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삶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된 시기였다.
병원에서 나는 나보다 훨씬 더 아픈 사람들을 보았고,
그중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이의 아이도 있었다.
한쪽 눈에 종양이 생겨 이미 전이가 된 상태였던
그 아이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하늘은 왜 이렇게까지 무심할까.
그리고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마음속으로 아주 작게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어떤 방식이든.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일상이 돌아오려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인도가 아니라
영국 런던으로의 재발령이었다.
그것도 아주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회사에서 아버지를 신뢰하고 있었고
동시에 나의 상황을 전해 들은 회장님께서
더 나은 치료 환경을 고려해
런던으로 발령을 내리셨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배려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 감사했다.
그렇게 우리는 인도가 아닌
영국 런던과 말도 안 되게 다시 재회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우연’과 ‘운명’이라는 단어를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만약 그때 내가 다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인도로 갔을 것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악과는
전혀 관계없는 길을 걷고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사건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다치지 않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삶은 때때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결국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조용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두 번째 반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는 몰랐다.
이 엄청난 사건이,
영원히 이별인 줄 알았던 영국을 다시 만나게 해 주다니..
어쩔 수 없이 잠시 내려놓았던 피아노 앞으로 결국 나를 다시 데려다 놓을 줄은.
피아노와 영국 런던의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된 셈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