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두 번째 만난 런던과 피아노

음악이 ‘진짜’가 되기 시작한 순간

by Yoontopia 윤또피아
열두 살, 두 번째로 마주한 런던은
다섯 살 때의 기억 속 런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에서 피아노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의 방향은 분명 인도 뭄바이로 향하는 듯 보였고,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삶은 늘 그렇듯, 사람이 세운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 인생은 이미 내가 모르는 방향으로 조금씩 궤도를 바꾸고 있었던 것 같다.




열두 살에 다시 영국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꽤 또렷하다. 분명 너무 뜻밖의 일이었고, 그래서 더 설렜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다섯 살 때 처음 왔을 때처럼 낯설고 신기해서 두리번거리게 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점이었다. 마치 오래 떠나 있다가 다시 고향 같은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린 나이였지만, 이상하리만큼 런던은 내게 ‘다시 온 곳’이지 ‘처음 온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글들을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이 흐름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해되실지도 모르겠다. 분명 내 길은 인도로 향하는 것 같았고, 우리 가족도 그렇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다시 하늘이 우리를 런던 영국으로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때 막연히, 아 이 모든 것에도 뜻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뜻이 곧 피아노의 길과 연결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음악이 아니라, 내 왼쪽 다친 눈의 검사와 치료였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서 많은 치료와 수술을 겪은 뒤였지만, 우리는 보다 자세한 진료를 위해 런던의 모어필드 안과 병원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마음 한편에는 아주 작은 기대가 있었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여기서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유명한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도 내 왼쪽 눈을 살펴보시고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손상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 지금으로서는 더 의료가 발달하고 좋아질 때까지 건강한 오른쪽 눈을 보호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우리 가족에게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 또한 당연히 그랬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때의 나는 한국에서 이미 겪을 수 있는 모든 과정들을 겪은 뒤여서인지, 더 이상 크게 놀랍지도, 새삼스럽게 무너지지도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충격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 더 컸다. 이미 여러 번 희망을 품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한 뒤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늘을 원망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빠졌던 순간들은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다시 좋은 환경으로 오게 하셔서 더 좋은 삶을 보게 하시려는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버텨냈다.


우리 집 가훈은

높이 올라, 멀리 보라!


결국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통해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마음이 이후의 나를 많이 지탱해 준 것 같다.


다시 시작된 런던에서의 삶에는 여전히 좋은 것들이 많았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처럼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영국 곳곳을 다녔고, 방학이 되면 다른 나라들도 여행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한 점이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부분은 정말 크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를 좋은 학교에 보내주시고 공부를 시켜주신 것만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린 나이에 그저 여행으로만 느꼈던 시간들이, 지나고 보니 내 시야를 넓혀준 커다란 선물이었던 셈이다.


다만 열두 살에 다시 본 런던은, 다섯 살 때 보았던 그 도시와 완전히 같으면서도 또 달랐다. 런던 자체는 여전히 비슷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도시를 바라보는 내가 조금 더 컸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마냥 좋고, 마냥 멋지고, 거의 천국처럼 느껴졌던 런던이 이번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어떤 부분은 조금 아쉽게도 느껴졌고, 어떤 부분은 생각보다 차갑고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마 그것이 자란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풍경을 두고도 전과는 다르게 느끼기 시작하는 것 말이다.


몇몇 독자분들은 이미 잘 아시겠지만, 영국의 학교 제도는 한국과 다르다. 한국은 보통 3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지만, 영국은 9월에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두 번째로 영국에 다시 왔을 때는 1월 말, 한겨울이었다. 그러니 나는 학교를 학기 중간에 지원해서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그때 우리가 살던 집 근처에 좋은 남자 공립 중학교가 있었는데, 운 좋게도 거기에 자리가 하나 났다고 해서 그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식으로 말하면 나는 Secondary School의 7학년 중간에 전학을 온 셈이었다. 만 열두 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 학교는 공부를 엄청 힘들게 시키는 명문 학교도 아니었고, 음악 교육으로 특별히 유명한 학교도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도 그 당시에는 피아노를 그냥 취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노를 완전히 놓지는 말고 그냥 꾸준히 하자,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의 나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눈만 다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아주 보통의 학생이었을 것이다.


게으른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든 피아노든 피가 나도록 열심히 해본 적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 당시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말수도 적었고, 늘 쑥스러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선생님 말씀은 잘 듣는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친구도 아주 소수만 있었다.


지금 내가 돌아봐도, 그리고 아마 독자분들이 보셔도, 그 시절의 나는 절대로 피아니스트가 될 것 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평범했고, 너무 안전한 삶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미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콩쿠르를 나가고 있었을 때, 나는 그런 세계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수소문 끝에 동네 근처에서 개인 피아노 레슨을 해주실 젊은 한국인 선생님을 찾아주셨다.


그 당시 대학원생이셨던 분인데, 영국에서 거의 태어나다시피 자란 교포 셔서 한국말을 거의 못하셨다. 그래서 수업은 자연스럽게 전부 영어로 진행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다섯 살 때 영국에 왔다가 한국에 잠시 돌아가 있는 동안 영어를 거의 쓰지 않다 보니, 다시 런던에 돌아왔을 때 마치 영국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영어가 너무 안 되었다.


한국말만 너무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달까. 부모님도 처음에는 그 점을 꽤 걱정하셨다.


더 신기한 것은, 나와 여동생이 집에서 영어를 거의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게 답답한 부분이셨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덕분에 한국말 모국어가 흔들리지 않았고, 한국 사람으로서의 감각도 잘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들 때문인지 내 영어는 바로 확 늘지 않았다. 게다가 언어 쪽으로 특별히 소질이 있는 편도 아니어서 한동안은 뒤처진 것이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다니던 중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자연스럽게 영국 친구들보다 한국 친구들과 더 어울리게 되었고, 한국말을 훨씬 더 많이 쓰게 되었다. 그러니 영어가 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생활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몇 안 되는 영국 친구들과도 천천히 친해졌고, 무엇보다 그 학교의 음악 선생님이 정말 열정적이고 좋은 분이셨다.


그 학교가 음악적으로 대단히 강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학교 콘서트에도 참여하고, 합창도 하고, 여러 가지 음악적 경험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느꼈다. 아, 확실히 선진국은 선진국이구나. 무조건 공부만 시키고 몰아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이 자연스럽게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는 시스템이 참 좋다고 느꼈다.


나에게는 그것이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나는 11학년을 마친 뒤, 12학년과 13학년, 그러니까 대학 진학 전 마지막 2년 과정을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경험해 보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음악 교육과 시스템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반 사립학교에 전액 음악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거기는 내가 다니던 공립학교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한국 학생이 거의 한두 명밖에 없었고, 대부분이 백인 학생들이라 영어를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환경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영어가 정말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국은 대학에 가기 전 2년의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는데, 그 시절 나는 더 심도 있는 음악 교육도 받고, 훨씬 다양한 기회도 누릴 수 있었다. 두 학교의 음악 생활은 각기 다른 의미로 즐거웠지만, 특히 사립학교에서의 경험은 내게 또 다른 문을 열어준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 개인 레슨 선생님이 마침 내가 훗날 연주학 박사로 졸업하게 되는 Royal College of Music (런던 왕립음악대학교)의 학생이셨다. 덕분에 그 학교뿐만 아니라 런던 음악 대학교의 대한 여러 정보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선생님께 2년 넘게 배우면서도 나는 그때까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컴퓨터 쪽에 더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때 나는 컴퓨터 게임을 정말 좋아했다. 물론 중독 수준은 아니었지만,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 자체에 대한 관심도 커졌고, 나중에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 어떨까 하는 꿈까지 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또 귀여운 시절이었다.


솔직히 그때의 내 피아노 연습 상태를 돌아보면, 정말 전공을 꿈꾸는 학생 같지는 않았다. 그냥 취미 학생처럼 연습했고, 열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음악의 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아마 그 개인 레슨 선생님께서는 내 실력 그 자체보다도, 내가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과 음악에 대한 애정만큼은 높이 평가해 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 내게 슬쩍, 피아노 전공도 한 번 염두에 두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침 Royal College of Music 주니어 프로그램 오디션을 한번 봐보라고 권하셨다. 붙든 떨어지든 좋은 경험이 될 것이고,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가 내가 열네 살 정도 되었을 때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꽤 고민하셨다. 굳이 거기까지 오디션을 봐야 하느냐는 생각도 있으셨을 것이다. 내가 당시 그렇게 눈에 띄게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솔직히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더욱더 택도 없는 실력이었다.


게다가 토요일 하루 다니는 주니어 과정이라 해도 1년 학비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 입장에서는 더 신중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내가 그만한 투자를 받을 정도로 열정과 노력을 100퍼센트 보여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피아노 선생님께서 오디션만이라도 꼭 보라고 부모님께 적극적으로 권해주셨고, 결국 나는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나는 토요일마다 어릴 적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다녔던 한글학교를 두 번째 영국 생활에서도 계속 이어서 다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영국 주재원 임기가 총 4년이었고, 이번에는 그 기간을 잘 마친 뒤 특례 입학 등으로 한국 대학에 들어가, 결국 한국에서 안정적인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족 모두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내가 컴퓨터 공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셨고, 나 역시 피아노는 여기서 적당히 정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Royal College of Music 주니어 프로그램 오디션 날이 다가왔다.


오디션 규정 중에는 두 번째 악기를 하나 준비하는 것이 권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급하게 클라리넷도 조금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 클라리넷 가방과 피아노 악보 몇 개를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엄청 긴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왜 그렇게까지 떨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까지도 나는 피아노 전공을 하겠다는 마음이 거의 없었고, 떨어져도 그만 붙어도 그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마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나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어떤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오디션장에는 남자 학장 한 분과 여자 피아노 교수님 두 분이 계셨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분위기를 굉장히 편하게 만들어주셨다는 점이었다.


이것도 내가 영국 교육의 장점 중 하나로 오래 기억하는 부분이다. 오디션을 오디션처럼 무겁고 숨 막히게 만들기보다는, 학생이 최대한 편안하게 자기 실력을 보여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태도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 떨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엄청 떨었고, 심지어 클라리넷을 조립하다가 중간에 떨어뜨리는 등 아주 허둥지둥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떠올려도 웃기고 민망하다.


그날 나는 피아노 두 곡, 클라리넷 한 곡을 연주해야 했다. 내 기억으로는 정말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아주 애매하고 매력 없는 연주를 했던 것 같다.


추가로 있었던 청음 평가는 거의 망했다고 봐야 했고, 초견은 그럭저럭 마쳤다.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간단한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꽤 진지하고 똑바로 답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연주보다 말할 때 조금 더 또렷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전반적인 오디션 과정을 내가 스스로 평가했을 때는, 떨어지는 것이 맞았다. 나와서도 거의 똥 씹은 얼굴로 부모님께 이번에는 안 될 것 같다고 했고, 피아노 선생님께도 전화를 드려 비슷하게 말씀드렸다.


세 분 모두 괜찮다고, 중요한 것은 경험이니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다독여주셨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생각보다 속상함과 아쉬움이 올라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오디션에 떨어지면, 나는 아주 깔끔하게 피아노에 대한 미련을 접고 컴퓨터 공학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시험은 내게 음악의 마지막 관문 같은 것이었다. 붙으면 모르겠지만, 떨어지면 정말 끝내겠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몇 주 뒤, 믿기 어려운 연락이 왔다.


합격


다음 해 9월, 그러니까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부터 입학하라는 안내였다.


지금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오디션을 제대로 본 편이 아니었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그 학교는 무엇을 보고 나를 뽑았을까..


그 기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 역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열두 살에 다시 만난 런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품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변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한 채 걷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컴퓨터 공학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혀가던 평범한 한 소년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가 결국 끝내 놓지 않게 될 하나의 길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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