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에서 시작된 변화와 선택
나는 그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 오디션을 망쳤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인생은, 가끔 내가 가장 틀렸다고 생각한 순간에 가장 이상한 선물을 건네곤 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그 오디션을 한마디로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다음 기회 없이 그냥 피아노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고, 나는 열다섯 살에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에 입학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솔직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정말 맞나 싶었다. 내가 붙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나는 열다섯 살, 9월부터 토요일마다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에 다니게 되었다. 마침 그동안 다니던 한글학교도 중학교 2학년 과정까지만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졸업과 동시에 바통을 넘겨받듯 새로운 토요일 학교 생활이 시작된 셈이었다.
처음 학교 건물을 봤을 때의 인상은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같았다. 건물 자체가 굉장히 웅장하고 멋졌고,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마법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마저 있었다. 그런 공간에 발을 들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끌렸다.
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동안 약 2년 넘게 배우던 한국인 피아노 선생님과의 개인 레슨은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는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해주셨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분도 어린 시절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 출신이셨고, 학사와 석사까지 그 학교에서 마치신 분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선생님이면서 동시에 먼 의미에서는 선배님이기도 했던 셈이다.
나는 그 선생님께 지금도 참 감사하다. 좋은 정보를 알려주시고,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셨을 뿐 아니라, 본인의 욕심으로 붙잡지 않으셨다. 오히려 본인보다 더 좋은 교수에게 가서 더 좋은 수업을 받아야 한다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어린 제자를 위해 그렇게 솔직하고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첫 토요일 입학 날의 기억도 아주 선명하다. 신입생들은 모두 강당에 모였고, 간단한 환영식이 열렸다. 오디션 때 심사위원으로 계셨던 주니어 학장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당시 기억으로는 조금 과장을 보태 한 150명쯤 되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피아노만 있는 학교가 아니라 모든 악기 전공 학생들이 함께 들어오니 인원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생들의 다양성이었다. 영국 학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당연히 한국 학생들을 포함한 아시아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웃긴 것은,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잘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다. 친구를 쉽게 사귀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의외다. 나도 그렇다.
환영식이 끝난 뒤 우리는 곧바로 시간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막연히 피아노 개인 레슨만 받고 집에 가는 정도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합창 수업도 있었고, 내가 두 번째 악기로 배우던 클라리넷 덕분에 윈드 앙상블과 윈드 오케스트라에도 들어갔다. 그 외에도 음악 이론 수업, 피아노 듀엣 클래스, 그리고 무려 90분짜리 피아노 개인 레슨까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다양했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 주니어 학교가 꼭 음악 전공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나중에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꼭 그 길을 가지 않더라도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녀가 음악 전공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그저 좋은 음악 교육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서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아,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이 점이 내가 영국 교육에서 크게 감탄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예를 들면, 아직 어린 아홉 살짜리 아이가 피아노 전공자도 아닌데 이미 프로처럼 연주하며 세계를 돌고 있었다. 또 어떤 친구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악기를 무려 다섯 개나 배우고 있었다. 바이올린, 피아노, 비올라, 첼로, 플루트. 그것도 대충 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실력으로..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음악 전공을 하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때 어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프로들은 뭐 먹고살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조금 웃기다.
그런 엄청난 환경을 접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안주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세상을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실력은 당시 기준으로도 형편이 없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적응하려 애쓰던 중, 첫 오전 수업이 바로 피아노 개인 레슨이었다. 합격 통지를 받은 뒤 학교 측에서 피아노 교수 명단을 보내주며 혹시 배우고 싶은 교수가 있으면 적어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부끄럽게도 그때 교수님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희망을 쓰지 않고, 그냥 랜덤 배정도 괜찮다고 냈다.
그렇게 배정된 교수님은 영국계이면서 약간 폴란드 혈통이 섞인 듯한 느낌의, 당시 40대 중반쯤 되셨던 남자 교수님이었다. 나를 처음 보시자마자 아주 반갑게 인사해 주시며 편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그 편안함 안에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로 크지 않으셨고, 약간 대머리에다 몹시 마르신 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엄청난 존재감이 있었다. 몸집과는 전혀 다른 후광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첫 수업이니만큼 교수님께서는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다. 한국에서 왔는지,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고, 나 역시 내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왼쪽 눈 사고로 인해 한동안 음악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일, 중간에 공백이 생겼던 시간들, 그런 나름의 아픔도 함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교수님께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제 실력이 솔직히 그렇게 뛰어난 것 같지도 않고, 시작도 늦은 것 같다고. 사실 저는 음악을 취미로 계속하면서 나중에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꽤 진심이었다. 실제로 주니어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도 1년 정도는 계속 컴퓨터 공학 쪽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어느 정도 컴퓨터 공부도 병행하고 있었다. 부모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국 특례 준비 같은 것도 조금씩 알아보고 계셨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뒤 교수님께서 내가 가져간 곡 하나를 쳐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내 현재 수준을 확인하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 연주한 곡은 프랑스 작곡가 풀랑크의 피아노 소품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오디션에서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연주를 마친 뒤 나는 교수님 얼굴을 바라봤다. 솔직히 긴장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아주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네가 왜 전공을 하지 않으려 했는지 알 것 같아. 그래, 지금으로서는 음악은 취미로 즐겁게 하는 것이 너에게 더 맞을 것 같구나.
문장만 놓고 보면 꽤 세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말이 상처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감사했다. 괜히 희망고문을 하거나 빈말로 포장하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 상태로는 프로 피아니스트의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미 열다섯 살이었고, 세상에는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거장급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훌륭한 연주자들만 해도 수두룩한 세계였다. 교수님 눈에는 내가 그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교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전공자를 대하듯 아주 꼼꼼하게, 진지하게 가르쳐주셨다. 어떻게든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애써주셨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예전 글에서 품고 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나는 오디션을 그렇게 망쳤는데 어떻게 합격했을까. 교수님께서 나를 맡기 전, 학장님께서 내 이야기를 전해주셨다고 했다. 아마 입학생들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을 담당 교수들에게 공유하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학장님 말씀으로는, 내 연주 자체는 솔직히 큰 매력이 없었지만 인터뷰할 때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사랑이 분명히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 열정과 가능성을 보고 뽑았다고.
반대로 연주는 훨씬 뛰어났지만, 음악을 억지로 하는 듯 보이고 진심 어린 애정이 보이지 않아 탈락한 학생들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꽤 놀랐다. 동시에 영국 교육의 어떤 제네러스함을 느꼈다. 당장의 완성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과 태도에도 문을 열어주는구나. 그래서 부모들이 왜 자기 자식들을 이런 환경에 보내고 싶어 하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더 완성된 학생들, 이미 스타성이 보이는 학생들이 선발되는 분위기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내가 다시 같은 오디션을 본다면 아마 말할 것도 없이 탈락일 것이다. 정말 냉정하게.
아무튼 그렇게 첫 학기가 지나고 첫 리포트를 받게 되었다. 역시 교수님은 매우 솔직하셨다. 피아니스트를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주 현명한 판단 같다고 쓰여 있었다. 내 테크닉도, 음악성도 그 환경에 맞추기에는 많이 뒤처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피아노는 최대한 잘 배워서 즐기고, 나중에는 컴퓨터 공학처럼 더 현실적인 전공이 있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지금 와서 보면 참 신기하다. 그때 그렇게 평가받던 내가 훗날 이 학교에서 석사와 연주학 박사까지 마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도 몰랐고, 부모님도 몰랐고, 아마 교수님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와 부모님은 그 리포트를 받고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이기도 했고, 내 눈 사고로 인해 음악 공부에 공백이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뒤처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던 셈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다.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는 만 8세부터 17세까지 다닐 수 있는데, 내가 만약 더 일찍 마음을 굳게 먹고 여덟 살쯤부터 이런 환경에 들어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물론 지나간 일에 가정은 의미 없지만,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생활 자체는 너무 즐거웠다. 다양한 음악 수업들은 정말 재미있었고, 매주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솔직히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토요일 음악학교에 가는 시간이 훨씬 더 좋았다. 어린 나는 가끔 진심으로 생각했다. 토요일 음악학교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학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그렇게 1년이 지나 내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시작되었다.
앞선 글에서 잠깐 언급했듯, 나는 일반 공립학교에서 음악 교육이 조금 더 체계적인 사립학교로 옮기게 된다. 음악 전액 장학생으로 영국식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과정을 보내게 된 시기였다. 그런데 그 무렵 우리 가족에게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는 원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4년 재발령을 내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야말로 내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출발점 중 하나였다. 만약 아버지가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셨다면, 우리 가족도 그대로 한국으로 따라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솔직히 한국에서 아버지의 월급만으로 내 음악 교육을 계속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족 상의 끝에, 아버지만 먼저 독일로 가셔서 기러기 생활을 시작하시고, 어머니와 나, 여동생은 영국에 남기로 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독일과 영국이 가까운 덕분에 2주에 한 번씩 영국에 와서 우리를 보고 가셨다. 이 일로 한국 특례 입학 계획도 자연스럽게 접게 되었고, 부모님은 나와 여동생 모두 어떤 전공을 하든 영국에서 대학까지 마치는 방향으로 마음을 정하신 듯했다. 우리도 그 결정을 자연스럽게 따랐다.
그 와중에도 나는 매주 토요일 왕립음악대학교 주니어에서 여러 음악 수업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교수님은 여전히 내 테크닉을 끌어올리기 위해 바흐, 체르니, 베토벤, 하이든 같은 바로크와 고전 작곡가들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짜주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 11번, Hob. XVIII/11을 배우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하이든은 나와 잘 맞는 작곡가라는 느낌이 있었다. 몇 주 동안 그 곡을 배우고 어느 날 레슨 시간에 교수님께 들려드렸는데, 연주를 다 마치자 교수님이 갑자기 몇 분 동안 아무 말이 없으셨다.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오늘 내가 정말 심하게 못 쳤구나...”
그런데 잠시 뒤, 교수님이 굉장히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셨다.
“너 진짜 그동안 정말 많이 늘었구나.”
말 그대로 대칭찬이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칭찬이었다. 그냥 예의상 던지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라신 듯한 반응이었다. “너,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그런 말씀도 하셨다. 물론 내가 갑자기 천재처럼 돌변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대 아니다. 다만 교수님 눈에, 내 위치에서 정말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이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교수님은 그날 한참을 감탄하시더니, 몇 주 뒤 열릴 주니어 학교 주최 피아노 협주곡 콩쿠르에 나가보자고 하셨다. 잘 준비해서 한 번 도전해 보자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사실상 내 첫 번째 비공식 대회 참가였다. 그것도 열여섯 살에. 평소라면 쉽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으실 교수님이셨기에, 그만큼 내 변화가 신기하게 느껴지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고,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물론 여전히 미흡한 점도 많았고, 상을 타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은 그 1년 동안의 발전을 꽤 만족스럽게 보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더 신기한 사실도 있다. 그 당시 콩쿠르 심사위원 중 한 분이, 훗날 내가 석사와 연주학 박사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교수님이었다는 점이다.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연결고리들로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 콩쿠르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순간의 감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희열이 너무 강렬했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처음으로 아주 진지하게
아,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순간이.
그전까지는 컴퓨터 공학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늘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실제로 연습도 하루 한 시간 할까 말까, 꽤 설렁설렁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콩쿠르가 끝난 뒤에도 나는 교수님이나 부모님께 바로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서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컴퓨터 공학이라는 단어는 내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연습 시간도 점점 늘었다. 예전 같으면 대충 넘어갔을 시간들을, 이제는 스스로 더 붙잡고 싶어졌다. 적어도 하루 두세 시간씩은 꾸준히 연습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더 발전해 가던 어느 날, 아마도 주니어 학교 입학한 지 2년 조금 넘은 16살 중반 때 일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솔로 레퍼토리로 교수님께 레슨을 받다가 내 인생의 방향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말을 듣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하려고 한다. 어쩌면 그때부터가 내가 진짜 음악 전공자의 길로 본격적으로 걸어 들어간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 이렇게 내 일기 같은 글들을 써 내려가면서, 나 역시 내 과거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도 결정적이었던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순간인지 잘 몰랐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이렇게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소중한 독자님들과 작가님들께 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부족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쓴 글이지만, 이렇게 함께 읽어주신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영광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나를 진짜 음악의 길로 한 걸음 더 밀어 넣었던 그 한마디를 꺼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