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음악학교 주니어 마지막, 그리고 대학 학사 오디션을 향한 시간
인생에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조용히 모든 방향을 바꿔놓는 순간이 있다.
지난 글에서 적었듯, 나는 작은 학교 콩쿠르를 계기로
아, 나도 정말 피아니스트의 길을 생각해봐야 하나
하는 마음을 조금씩 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생각이었다. 아직은 막연했고, 아직은 확신보다는 가능성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엔진은 걸렸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출발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피아노가 그저 좋아서 하는 것을 넘어, 혹시 이 길이 내 삶의 방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조용히 마음속에서 시동을 걸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 주니어 학교에 입학한 지 2년 조금 넘었을 무렵, 내가 열여섯 살 중반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또 다른 솔로 레퍼토리로 교수님께 레슨을 받고 있었고, 마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배우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곡을 연주했고, 이제 교수님의 피드백을 들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공기는 조금 달랐다. 교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어딘가 조심스럽고 심지어 약간은 죄송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여셨다.
교수님은 예전에 나에게 했던 말을 사과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처음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내가 피아노는 취미로 계속하되 대학은 컴퓨터 공학 쪽으로 가는 것이 더 맞겠다고 판단했던 그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 마음이 바뀔 수 있다면, 컴퓨터 공학을 아예 접고 정말 진지하게 피아노 전공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교수님께서는 지난 2년 동안 나를 가르쳐보면서, 내가 꽤 많이 발전한 학생들 중 한 명이라고 하셨다.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한 줄기의 희망 같은 것이 보였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여기서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갑자기 천재성을 드러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발전이라는 것도 정말 밑바닥에서 조금 올라온 정도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내 수준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솔직히 코흘리개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다만 교수님은 그 아주 작고 더딘 변화 속에서도 무언가 가능성을 읽어주신 것 같다.
무엇보다 묘했던 것은 타이밍이었다. 나 역시 그 무렵부터 피아니스트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도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교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건네신 것이다. 그래서 더 놀랐고, 더 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우연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때의 내게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순간에 닿은 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선택은 내게 정말 인생을 좌우할 갈림길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거의 80퍼센트쯤은 컴퓨터 공학 쪽으로 대학 입학 원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그동안 더 이상 정보를 찾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미 한쪽 방향으로 꽤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아마 교수님 본인도 그 점을 아주 무겁게 느끼셨을 것이다. 자칫하면 한 학생의 인생을 흔들 수 있는 선택이 될 수 있으니, 그 말씀을 굉장히 진지하게 꺼내신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그날 레슨 시간에 거의 30분 가까이 이 문제를 두고 깊게 이야기했다.
내게는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큰 리스크 테이킹이었다. 거의 도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체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 편이었다. 왼쪽 눈을 다친 일처럼 큰 사고를 겪은 적은 있었지만, 성격 자체는 늘 안전빵을 좋아했고, 큰 굴곡 없이 사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 인생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선택 앞에 서게 된 것이다.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기대도 되었고, 겁도 났고,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두려움과 설렘이 정확히 반반씩 섞여 있었다.
교수님은 한 가지를 더 덧붙이셨다. 피아니스트의 길은 정말 굉장히 어렵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성격도, 태도도, 각오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 말은 지금 돌이켜봐도 참 정확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친구들처럼 처음부터 음악만 바라보며 달려온 학생이 아니었고, 창피할 정도로 꽤 설렁설렁 해온 편이었다. 교수님께서도 그 부분을 걱정하셨기에,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피아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뒤였기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히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내 생각을 분명히 말씀드렸다. 지금 이 타이밍에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을 어쩌면 하늘의 뜻처럼 느낀다고, 겸허히 받아들이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의 마음은 정말 절박했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하면 삶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도, 그 시절의 내 심정에서는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며 기뻐하시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이 걱정하셨다. 그럼에도 대학 입시 전까지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참 감사한 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교수라고 다 같은 교수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학생을 진심으로 이끌어주기보다 그저 대강 가르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참 인복이 많았다. 좋은 스승을 만났고, 그 점에서 운이 좋았다. 지금 돌아봐도 그 사실은 늘 감사하다.
마침 그 무렵, 내가 다니던 일반 사립 고등학교에서도 여러 기회를 얻고 있었다. 나는 전액 음악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교 안에서 열리는 여러 공연과 콘서트에 대표로 연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그 학교는 런던 정부의 서포트를 받는 사립학교라 중요한 행사에는 런던 시장이나 국회의원분들이 오셔서 학생들의 연주를 듣는 자리도 있었다. 그런 중요한 무대에서도 연주했고, 마지막 학년에는 학교 오케스트라와 대표로 협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작고 큰 이벤트들이 계속해서 나를 앞으로 밀어준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영국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어릴 때의 교육 환경과 시스템만큼은 분명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력은 뒤로하더라도 말이다.
그날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이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은 당연히 많이 걱정하셨다. 처음에는 이미 준비하던 컴퓨터 공학 쪽으로 가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너무도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게, 정말 피아니스트의 길로 가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더 이상 억지로 다른 길을 권하지 않으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정말 사랑하고, 정말 하고 싶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내 결정을 존중하고 서포트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 부분이 지금도 너무 감사하다. 부모님께도 늘 말씀드리지만, 그 믿음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부모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걱정은 하셨다. 늦게 방향을 바꾸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종의 보험처럼 일반 음악 대학교도 함께 지원해 보라고 하셨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나 연세대 같은 일반 대학의 음악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처럼 실기 중심의 특수학교가 조금 다르듯이, 영국도 비슷하게 나뉘어 있었다. 물론 내가 한국에서 직접 공부해 본 것은 아니니 조심스럽게 말해야겠지만, 당시 내 인상으로는 영국의 일반 음악 대학교는 비교적 리서치와 아카데믹한 공부의 비중이 크고, 왕립음악학교 같은 콘서바토리는 거의 실기 위주로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래서 주로 연주보다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 쪽을 생각하는 친구들은 일반 대학교의 음악과를, 연주자의 꿈을 키우는 친구들은 콘서바토리를 더 많이 지원하는 편이었다.
물론 여기서도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일반 대학교를 나왔다고 연주자가 못 되는 것도 아니고, 콘서바토리를 나왔다고 해서 선생님이나 교수가 못 되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포커스의 차이일 뿐이다. 이 부분은 순전히 그 당시 내가 이해하고 있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니,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뮤지션 분들이나 독자분들 중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다.
아무튼 부모님의 제안에 나도 동의했다. 영국에서는 그때 일반 대학교를 총 여섯 군데까지 지원할 수 있었기에, 음악과가 괜찮다고 알려진 학교들을 조금 리서치해서 여섯 군데를 골라 지원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교수님께도 말씀드렸더니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며 동의해 주셨다.
한편 콘서바토리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조금 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런던에는 당시 네 개의 주요 콘서바토리가 있었는데, 그중 교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조금 알고 지내시는 정말 훌륭한 영국인 피아노 교수님이 계신 학교가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꼭 그분의 학사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셨다. 그 학교가 바로 그리니치, 이스트 런던에 위치한 Trinity Laban Conservatoire of Music and Dance였다. 그래서 내 우선순위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정해졌다. 계획은 단순했다. 트리니티 라반에 붙으면 그곳으로 가고, 만약 떨어지면 일반 대학교 여섯 곳 중 합격한 곳에 가는 것. 말하자면 플랜 B를 확실히 마련해 두는 셈이었다.
그만큼 나는 늦게 결정했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100퍼센트는 없었다. 그래서 늘 플랜 B를 준비해두려 했다. 역시 나는 안전빵 인간이었던 것이다. 재수해서 다시 더 좋은 데를 노려보자, 이런 여유 있는 발상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안 되면 큰일 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나답기도 하다.
이 모든 결정을 대략 8월 말이나 9월쯤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음악 콘서바토리나 일반 대학교는 대개 10월 초까지 원서를 지원해야 했고, 오디션은 보통 같은 해 11월 말에서 12월 초 사이에 이루어졌다. 당시 내가 지원하려던 콘서바토리 오디션은 피아노 곡 총 세 곡을 준비해야 했고, 총 연주 시간은 대략 10분에서 15분 사이였다. 거기에 초견, 청음 테스트, 인터뷰까지 모두 잘해야 했다. 런던은 경쟁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정말 프로페셔널한 음악가가 되고 싶어서 지원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였기 때문에, 내가 예전 주니어 오디션처럼 어설프게 갔다가는 왜 여기 오디션을 보러 왔느냐는 핀잔만 들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일반 대학교는 원서를 넣고, 학교 측이 관심을 보이면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한 뒤, 거기서도 좋게 평가되면 필요한 A-Level 시험 (한국으로 치면 수능시험) 점수를 제시하고 그 조건을 충족하면 합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내 꿈은 어디까지나 연주자 쪽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준비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콘서바토리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9월에 결정을 했고 오디션이 11월 말이나 12월 초였다면, 많아야 서너 달, 실질적으로는 거의 석 달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 웃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정말 하마터면 나는 트리니티 라반 콘서바토리 원서 지원조차 못 할 뻔했다. 위에서는 마치 엄청난 각오와 결심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써놨지만, 현실의 나는 허당끼가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솔직히 좀 헛똑똑이 같은 부분이 있지만, 특히 어릴 때는 더 심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나는 원서 데드라인이 10월 5일까지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10월 2일쯤 보내면 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원서 가이드를 우연찮게 다시 꼼꼼히 보시더니 갑자기 “어?! 이거 10월 1일까지 데드라인인데?!”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이드를 확인하신 날이 바로 마감 날인 10월 1일이었던 것이다. 하.. 세상에 마상에.. 진짜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정말 온 세상이 노래지는 느낌이 뭔지 처음 알았다.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나를 엄청 야단치셨다. 이런 중요한 걸 제대로 읽지도 않고 안주하면서 어떻게 피아니스트라는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하느냐고. 어머니 말씀이 맞았다. 참 자존심 상하고 가슴 아팠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책뿐이었다. 게다가 그날이 내 기억으로 오후 네 시쯤이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편하게 원서를 보내는 시스템이 아니라 우편으로 직접 서류를 준비해 보내야 하는 경우였다는 점이다. 즉, 직접 우체국에 가서 붙여야 했는데, 우체국은 오후 다섯 시면 문을 닫았다.
결국 나는 어머니와 함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서류를 부랴부랴 준비했고, 우체국 문 닫기 30분 전에 겨우 도착해서 허겁지겁 속달 우편으로 보냈다. 지금 돌아봐도 정말 어이없고, 또 창피하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해놓고 정작 원서 마감일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니.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굉장히 실망했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다음 날 접수가 잘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정말 어머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게다가 그때 아버지는 이미 독일 함부르크로 재발령을 받아 근무 중이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생각한다. 모든 어머니들은 정말 위대하다고.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이 에피소드를 주니어 피아노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수님답게 아주 영국적으로 나를 격려하시면서도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충고하셨다. 한마디로 이제 정신 단단히 차리라는 뜻이었다. 따뜻했지만 분명한 경고였다.
한편 그 해 여름 방학 동안 우리는 잠깐 아버지를 뵈러 함부르크에 몇 주 머물렀다. 그때 아버지 회사 직원분 중 한 분의 아내께서 독일에서 활동하는 첼리스트셨는데, 아버지가 독일 음대는 어떨지 한번 알아보자고 제안하셨다. 독일 역시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 중 하나이고, 함부르크에도 나름 괜찮은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첼리스트 분의 도움으로, 내가 머무는 동안 현지 대학에 계시는 피아노 교수님께 잠깐 사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내 실력과 가능성을 점검해 보는 의미도 있었다.
당시 내가 오디션 곡으로 준비하고 있던 세 곡 중 하나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B flat 장조 K.570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바로크와 고전을 좋아했고, 특히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정말 좋아하는 작곡가들이었다. 그래서 그 곡을 들고 독일 교수님께 찾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시작부터 많았다. 독일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고, 나는 워밍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레슨을 받으러 갔다. 게다가 독일어는 전혀 못했기 때문에, 그 첼리스트 분이 통역을 맡아 함께 동행해 주셨다. 교수님은 반대로 영어를 거의 못하셨다. 그렇게 간단히 소개를 마친 뒤 교수님께서 나에게 모차르트를 연주해 보라고 하셨는데, 나는 원래 외워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었음에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악보를 보고 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마 그 순간부터 교수님이 약간 언짢으셨던 것 같다. 왜 안 외웠느냐고 물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연주는 정말 엉망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음대 지원을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교수님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많이 제시해 주셨고, 수업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다만 결론은 냉정했다. 교수님은 내가 아직 너무 부족하고, 독일 음대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게다가 독일어까지 되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다고.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나는 그 경험 자체가 굉장히 좋았다. 그런 현실적인 피드백도 결국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독일에서 돌아온 뒤, 나는 9월부터 정말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 오디션 날짜를 확인해 보니 내가 첫 오디션 날짜에 배정되어 있었다. 11월 중순 말쯤이었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은 정확히 두 달 반 남짓이었다. 그 순간에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도 들었지만, 동시에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오디션 곡으로 준비하려 했던 세 곡은 앞서 말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B flat 장조 K.570와 더불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 C 장조 Op.2 No.3, 그리고 쇼팽 녹턴 B장조 Op.32 No.1이었다. 교수님은 늘 레퍼토리 선택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균형감 있게 짜야 다양성도 보여줄 수 있고, 그 안에서 나만의 색깔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오디션에서 가장 잘 보일 수 있도록 고심해서 짜주신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곡들의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전까지의 느슨한 접근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한 음, 한 음을 자세히 신경 써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주니어 교수님과의 레슨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도 높고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더 이상 취미생이 받는 레슨도, 취미생이 하는 연습도 아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그 와중에도 나 자신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원래도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데, 이렇게 급하게 준비를 시작했으니 자신감이 클 리가 없었다. 교수님은 늘 나에게 작곡가가 왜 이 곡을 이렇게 썼는지, 그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하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나만의 색깔을 덧입힐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곡가의 의도를 읽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더구나 자칫 나만의 색깔을 너무 강하게 덧씌우면 곧바로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나기 쉬웠다. 그 중간 지점을 찾는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기술적인 면도 큰 문제였다. 내 테크닉이 많이 뒤처져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걸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끌어올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후회하고 한탄만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한 번 더 연습하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다만 여기서 너무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남들처럼 하루 열 시간 이상씩 미친 듯이 연습한 것도 아니었다. 일반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연습한다고 해도 길어야 한두 시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당시 내 가장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는 바로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매사에 나는 늘 그랬고, 그 때문에 자주 지적을 받았다. 조금만 해도 스스로 만족해 버리는 것. 아직 만족하면 안 되는데, 자꾸 조급한 안도감을 택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 대목을 보고 내가 너무 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비하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다. 그 시절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쌓아가던 중, 드디어 오디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부터는 교수님 앞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연주해 보며 긴장감에 익숙해지려 했다. 심리적인 컨트롤, 컨디션 관리, 마인드 컨트롤까지 나름대로 신경 쓰며 그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오디션 날이 왔다.
나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다려주시고 챙겨주신 정장을 스마트하게 차려입고 트리니티 라반 콘서바토리로 향했다.
위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학교가 생긴 것도 멋지고 템즈강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똥물이라고 불림) 옆에 위치해 있어 운치가 있지만 그때는 이런 풍경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나의 발걸음은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몹시 무거웠다. 기대도 되었고, 너무 떨리기도 했고,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끊임없이 들었다. 기차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악보를 계속 펼쳐보며 머릿속으로 연주를 되뇌었다. 오디션은 점심 무렵이었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나는 넉넉하게 미리 도착했다. 영국 교통은 늘 믿을 수가 없으니까. 공사니 지연이니 하는 일이 워낙 많아서, 임박해서 갔다가는 정말 큰일 날 수 있었다. 헐레벌떡 도착해서 오디션을 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리셉션에 가서 오디션을 보러 왔다고 알리고 등록을 마친 뒤, 나는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대기실에는 내 앞뒤로 많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다들 너무 잘 칠 것 같아 보였고, 뭔가 있어 보였다. 솔직히 많이 주눅이 들었다. 신기했던 것은, 그날 그 콘서바토리 오디션에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던 것 같다는 점이다. 동양 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을 뿐, 생각보다 아시아 학생이 많지 않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유럽이나 북남미 쪽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묻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금방 친해지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그저 구석에 조용히 앉아 내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나답다. 이런 데서까지 갑자기 사교성이 폭발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내 시간이 다가왔다.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의 기분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갑자기 긴장이 확 몰려왔다.
그 오디션 문이 열리던 순간, 나는 그날의 오디션이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짓누르던 걱정과 긴장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날 그 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