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게 주방을 정리해 주시고, 우리 옷도 어찌나 칼 각을 잡아서 개어주시는지, 손 베일 뻔했다. 일을 잘하긴 참 잘하셨다. 다들 손발 맞춰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인터넷 설치 기사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와이파이는 이삿날 설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미리 신청해 두었는데,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온 것이다.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운데, 인터넷 기사 아저씨는 다짜고짜 “아파트가 오래되어서 아마도 인터넷이 자꾸 끊길 것.”이라고 했다.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파트가 오래된 것과 인터넷 와이파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기사 아저씨는 침 튀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는 동네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데, 지을 당시부터 벽 안에 있는 인터넷 선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TV 보다가 끊기고, 스마트폰 하다가도 끊기는 문제가 많은 아파트다. 그래서 신호가 더 강력한 프리미엄 상품으로 계약해야 안 끊기고 볼 수가 있다. 일반 상품으로 그냥 계약하면 100퍼센트 나중에 더 잘되는 상품으로 갈아타게끔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위약금을 내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되는 상품으로 가입해야 뒤탈이 없다. 듣자 하니, 일반 상품이랑 이거랑 이만 원 밖에 차이가 안 난다면서, TV 채널도 훨씬 많이 나오는 프리미엄 상품으로 가입해야 이득이지, 생각해볼 것도 없어. 내가 잘해줄게.
요는 이랬던 것 같다.
사실, 이삿짐 아저씨들의 칼 각 맞추기와 숨 가쁘게 착착 맞는 호흡, 그리고 사모님, 이거 여기 둘까요, 저기 둘까요 하는 질문 공세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는데, 그 와중에 인터넷 기사의 설명을 제대로 다 알아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 아저씨는 남편과 나의 혼을 쏙 빼놓았다. 어디서 이사 들어오는 거냐, 아이들은 몇 살이냐, 이 동네는 어떻게 알고 오는 거냐, 요 앞에 시장 있어 살기 좋다. 등등 끊임없이 질문하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간 남편의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에서 살았다. 신혼생활로 시작해, 그곳에서 13년째 살다가 이제 이사를 나온 참이었다. 사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과잉보호받으며 순한 양처럼 살아왔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눈 가리고 코 베이는 마흔 짤의 어른이들이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 내가 물었고
“음...... 그럴......까?” 남편이 대답했다.
인터넷 기사 아저씨는 자기가 처리를 다 해주겠다며, 원래 인터넷 설치를 신청해두었던 곳에 우리 대신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과 한참 얘기를 나누더니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나, 남편입니다. 네 본인이에요.” 하는 말이 들렸다.
응? 남편이라니? 원래 계약하려던 상품보다 더 비싼 상품으로 바꾸면 통신사가 먼저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인데 왜 거짓말까지 하지? 이상했다. 아저씨는 우리를 홀렸던 정신없고 끊임없는 말로 상담원에게 뭐라 뭐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됐어요, 자, 여기 서류 있으니까 사인하시면 돼요.”
사인하라고 내민 서류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상품 설명과 약관이 적혀 있었다.
“자, 여기, 여기, 여기에 사인하세요.”
볼펜을 쥐고 사인을 하려고 훑어봤다. 근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내가 신청했던 통신사는 S*텔레콤이었는데 아저씨가 내민 서류에는 L*텔레콤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 L*텔레콤?”
“아, 네. L*텔레콤의 프리미엄 상품 맞아요. 이게 잘 터진다니까요.”
“우리는 S*텔레콤에 예약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아~ 예약을 하셨었구나. 아니, 나는 예약되어 있던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나는 S*텔레콤도 하고 L*텔레콤도 하고 다 해요. 상관없어요.”
“네? 그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어... 나는 원래 이렇게 다니면서 영업 잘해요. 밖에서 보니까 이사하시길래 한번 와 봤죠.”
뭐?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일까......
이 아저씨는 이사하는 아무 집에 찾아 들어가서 인터넷계약을 따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비싼 요금제를 팔아야 수당을 많이 챙기니 어떻게든 프리미엄 요금제로 계약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는 아파트가 오래됐네, 인터넷이 안 터지네 하는 헛소리를 나불나불 잘도 지껄이는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었다. 원래 해뒀던 계약까지 내 남편을 팔아가며 취소시키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계약서를 내밀다니. 너무 열이 받았다.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저씨. 우리는 우리가 예약했던 곳의 기사분이신 줄 알고 계약하려던 거였어요. 이렇게 그냥 들어오셔서 하시는 분인 줄은 몰랐어요. 저희는 저희가 알아봤던 대로 할게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좋게 얘기했다.
“아이참, 여기 진짜 인터넷 안 터진다니까요. 이 아파트에 우리 어머니도 살아서 내가 잘 안다니까. 왜 이렇게 내 말을 못 믿으셔. 나중에 위약금 백 프로 문다구요.”
이 양반이 이제 지 엄마까지 팔아먹네.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에다 패륜아였다.
그때, 이삿짐 사장님이 끙하며
“아, 쫌 비키라. 짐 옮기는 거 안 비나(안 보이나?)?”라며 사나운 표정으로 인터넷 기사를 쳐다봤다.
참고로 이삿짐센터 사장님은 키가 160센티 정도에 머리는 일명 깍두기 머리, 배만 보면 임신 8개월쯤 되어 보였다. 일할 땐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는데, 쏘아보는 눈이 매서웠다. 멀대같이 키만 크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인터넷 기사는 사장님의 호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얼른 이거 사인만 하나 하자고, 진짜 나중에 후회한다고 작게 소곤거렸다.
“아저씨, 나중에 프리미엄으로 바꾸게 되더라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그만 가주세요.”
“하아... 아닛, 하참...”
기사 아저씨는 다 된 밥에 코 빠트렸단 표정을 하고는, 나가면서도 영 아쉽다는 듯이 멈칫멈칫하며 자꾸 뒤돌아봤다. 아저씨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세상에, 귀가 살겠다. 세 치 혀로 남의 등쳐서 먹고살려는... 참 답답한 인생이었다.
남편과 내가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았는지 이사 첫날 확실히 깨달았다.
마흔짤의 어른이들이라니......
예의 그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인터넷 신청을 다시 했다. 설치부터 사용설명까지 30분도 채 안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