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잠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by 유념

나는 여름이 싫다.


아마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아이스크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름만 되면 녹아 사라져 버려 형태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끈적한 액체로 남아 흩어져 없어지기 전에 여름이 끝나가기만을 기다렸으리라.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더위에 허덕이고 있다.


나는 유독 여름에 약하다. 여름만 되면 몸이 축축 처진다.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이번 여름이 앞으로 남은 여름의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데 앞으로는 더 걱정이다. 이 더위에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름 나의 위치는 홈 프로텍터였다. 쉽게 말하면 백수라는 소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간의 인턴 생활을 끝으로 예정대로 퇴사했다. 자기소개서를 채우기 위한 이 1년 치 경험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끝이 났다. 또 다음을 찾기 위해 그나마 쓸 만한 것들을 함께 구겨 넣는다. 그리고 그 쓸 만한 것들 사이에 거짓된 마음을 숨겨 넣는다.


시원했던 바람은 습기와 더위로 가득 찬다. 공기가 무거워진다. 점점 무거워져 한숨 하나 내쉬기 힘들어진다. 이 한숨이 나에게 나온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쯤이면 형태만 겨우 갖춰진 페이지가 그제야 완성된다. 이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의 소리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린다. 뜨거운 햇빛 아래 쌓여가는 텁텁한 시간 속에 녹아간다.


이대로 녹아 잠들고 싶다. 이 무더운 여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싶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면 저절로 눈이 떠졌으면 한다. 아, 드디어 기다리던 추위가 왔구나 하고. 지치고 지겨운 이 시간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줄까. 대답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결과 없는 수많은 과정을 지나온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의미해지는 시간이다. 중요하다던 그 과정은 그럴듯한 결과가 있어야 의미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덥다 못해 뜨거운 이 열기가 점점 불태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불태우기 시작한다.


잠시 비가 내린다. 미적지근한 물방울이 섞여 들어온다. 무거워진 숨을 조금씩 내뱉는다. 그대로 여름잠에 빠진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다. 해가 없는 틈을 타 도망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을 없다고 하던가. 하지만 난 애초에 낙원 따위를 원한 적 없으니 괜찮다. 그저 눈을 감고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언제쯤 이 길고 긴 여름이 끝날까. 끝나긴 할까.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 영원할 것만 같던 여름이 조금씩 힘을 잃기 시작한다.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온다. 무던히 흐르던 시간은 어깨를 슬며시 두드리며 너를 괴롭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고 전달해 준다.


일시 정지. 그래. 여름잠은 나에게 일시 정지였다. 이 시간을 그저 무사히 넘어가기 위한 나의 작은 몸부림 또는 잠시 눈을 돌리기 위해 멈춰두었던 쉬는 시간. 이제야 그 시간의 의미를 찾아갔다. 더위가 한풀 꺾이니 웅크렸던 몸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한다. 살았다. 나는 살아남았다. 무감각하던 신경들이 손끝부터 느껴진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천천히 주먹을 쥐였다 펴본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힘없이 녹아내려 아스팔트 바닥에 끈적하게 없어진 아이스크림이 아니었구나.


여전히 여름잠을 견뎌내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또는 너에게 이 말만 전하고 싶다. 그저 이 담백한 한마디.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