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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Oct 04. 2022

직장인 모드가 설정되었습니다

나를 지키는 방어막이자 나를 가두는 철벽

 더웠다가 추웠다가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감기가 오나 보다. 아침부터 목은 칼칼하고 머리는 지끈거린다. 회사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컨디션까지 나쁘니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돼지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출근길에 나선다. 하지만 나쁜 컨디션은 회사 앞에서 끝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는 나는 어느새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를 외칠 것만 같은 화사한 미소를 띤 직장인 모드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일에 하하 호호 인수인계부터 가식이 넘쳐 흐른다. 관심 없는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해 리액션을 한다. 잘못된 일을 지적해야 할 때도 '······한 어려움이 있어서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라며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는 나는 돌려 말하기의 달인이다. 적당히 친절하게, 적당히 예의 바르게, 진짜 속마음은 잠시 숨겨두는 것. 현재 나의 직장인 모드다.


 직장인 모드를 처음 장착하는 곳은 면접에서다. 간택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면접자들은 면접위원의 눈에 최대한 좋은 모습만을 보이기 위해 기분 나쁜 질문에도 명랑한 척, 긴장감에 손이 떨려도 의연한 척, 관심이 없어도 있는 척을 해야 한다. 이런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 신입사원 모드이고, 신입사원 모드에서 긴장감을 덜어내고 숙련자 다운 모습을 한 스푼 첨가하면 마침내 직장인 모드가 된다. 더 이상 간택받을 필요는 없지만 직장에서 좋은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도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이는 직장에서 사적으로는 도저히 잘 지내기 어려운 사람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만한 게 없다. 직장인 모드에서는 기분과 상관없이 모두를 친절하게 대할 수 있고, 속으로는 욕을 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을 수 있다. 또 친절하지만 정중하기에 묘하게 선 긋는 느낌을 풍겨서 너무 가까워지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다. 직장에서 격 없이 친하게 지내다 보면 너무 편해져서 막말을 한다든지 일을 미루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직장인 모드는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하므로 이런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은 만들지 않으면서 공적인 친밀감은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절한 직정인 모드라도 적당한 거절은 수반되어야 한다. 상사가 주는 술이라면 억지로라도 다 먹어야 하는 줄 알았던 신입시절에도 나는 직장인 모드로 열심히 회식에 참석했다. 그때는 직장인 모드뿐만 아니라 신입 모드와 막내 모드까지 합세해 분해하지도 못하는 알코올을 처리하느라 전전긍긍했다. 아무리 취해도 얼굴이 빨개지기는커녕 하얘지는 체질과 직장인 모드의 힘으로 나는 열심히 술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회식 다음날 숙취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로 출근을 했으니 내가 말술이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아버렸다. 집에서는 토하다가 변기를 붙잡고 잠들면서도 주는 술을 쳐내지 못했던 거절 없는 직장인 모드 탓이다. 속만 버릴 뿐 쓸모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짓인데 그때는 그것이 회사에 잘 적응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막내+신입+직장인 모드가 빚어낸 환장의 콜라보였다.


 그래도 신입 모드를 벗어나고부터는 나 스스로 직장인 모드를 제법 잘 사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적당히 선 긋고, 적당히 프로페셔널하게, 같은 일을 해도 뭔가 있어 보이게. 나의 직장인 모드는 나날이 버전을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항상 좋을 만은 없기에 간혹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소소한 에피소드일 뿐 큰 풍파는 없다는 것이 자부심이었다. 직장인 모드를 시전 하는 후배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일도 잘하는 후배들이지만 직장인 모드로 일하는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싫지는 않지만 기계적인 웃는 얼굴로 뒤에서는 무슨 말을 할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사람들은 나에게서도 똑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내 눈에 보인다면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눈에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빤히 보였을 것이다. 간혹 나를 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던 이들이 떠올랐다. 내가 선택한 적당한 거리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못 믿을 사람으로 여겨졌겠구나. 직장인 모드의 치명적인 단점은 진짜 내 편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임을 그동안 잊고 있었다. 풍파 없음이 사실은 큰 풍파라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직장인 모드는 나를 지키는 방어막이자 나를 가두는 철벽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직장인 모드를 포기할 수가 없다. 이 험난한 직장에서 상처받지 않고 온전한 나를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어막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는 사람을 모두 막아내는 지금 버전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고심 끝에 나는 철벽에 조그마한 창문을 만들기로 했다. 그 작은 창문으로 닮고 싶은 선배들, 괜히 마음이 가는 후배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사적인 마음을 나누는 사람 한두 명만 직장에 생겨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의 직장인 모드를 해제시켜줄 편안한 인연이 생기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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