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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Jun 08. 2020

차별, 그 혹독한 부메랑의 원리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나로서는 ‘여성’이라는 것을 잊거나 혹은 때때로 지움으로써 비교적 편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나 보다. 굳이 그딴 걸 드러내서 뭐해. 사춘기 시절, 그런 식으로 말하거나 생각한 적은 없어도, 몸소 체험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타고난 성을 가리는 식으로 나를 조심시켜 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사춘기에 시작되는 2차 성징에 인생이 끝날 것처럼 슬퍼했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도 간직한 사람마냥 행동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타고난 내 존재를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부정하려고 들지는 않게 된 것 같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말로는 나 아닌 다른 이가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과 불안감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체하는 것은, 언제나 그 얄팍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인생은 여러 방식으로 순환된다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 자식을 낳게 되고 나와 닮은, 혹은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를 대하게 되면서 그 애가 겪을 아픔과 고통을 미리 상상하게 되고, 대비시킬 수 있다면 완전 군장에 운동장 10바퀴 뺑뺑이라도 시킬 태세로 달려들게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통제와 폭력이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나와 닮은 아이가 겪을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면 이성의 끈을 놓게 된다.

그러니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가 난데없이 축구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선뜻 축구강습을 시켜주지 못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간 남동생이 축구를 배우는데 ‘너는 안 돼’라고 말할 명분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였을까. 축구하겠다고 나선 아이에게 안 된다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

아마도 아이가 축구를 배우고 싶다고 얘기를 하게 된 것은 학교 체육시간에 축구를 해 봤는데 본인이 좀 잘 하는 것 같고, 해보니 재미있고, 애들이 잘 한다고 추켜 세워줘서인 것으로 판단된다. 겨우 그 정도로 축구를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축구란 게 어떤 운동인가. 남녀를 나눠서 할 수밖에 없겠다 싶을 정도로 심판이 안 보는 곳에서 몸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공 하나 골대에 넣어보겠다고 2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90분 동안 넓디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운동 아닌가. 운 좋게 프로 선수가 된다고 해도 부상이라도 당하면 시즌 날려먹는 건 일도 아니고 아예 운동을 접게 되면 미래가 막막하다는… 근본 없이 축구를 접하면서 미디어와 주변 지인들을 통해 들은 안 좋은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게다가 여자 축구선수라. 지소연, 여민지, 앨리스 모건…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선수는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여자축구 대표팀이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땄다는 데 경기를 본 기억도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여자 축구부를 거쳐 어찌어찌 프로 선수가 된다고 쳐도 이후의 진행상황이 평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이가 평탄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그런데 과연 나의 망설임에 끼어든 것이 미래에 대한 걱정, 그것뿐이었을까.     

아이는 장래희망을 축구선수로 설정한 이후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처럼 보였다. 일단 아빠부터 ‘그저 축구는 취미로 해.’ 할머니는 ‘무슨 여자가 축구야. 리듬체조 하던 거나 하지.’ 주변 지인들은 ‘역시 ○○이는 달라. 대단한데.’ 뭐가 대단한 건지 이유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난데없이 엄지 척 동작까지 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아이는 대번에 차별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는 없어도 뭔가 불합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자기는 여자인 게 싫다고 했다. 전에도 “핑크, 핑크” 하던 애는 아니었지만 그즈음부터 핑크는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색이 됐다.


아이의 불편한 감정을 ‘차별’이라는 말로 정리해 준 것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바로 축구강습을 시켰다. 초등반 3~40명 정도 되는 아이들 중에 여자 아이는 우리 애 혼자다. 그리고 나는 삶이 가장 불편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어쩌면 가장 아픈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꼼짝없이 그 아픔을 버텨내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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