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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Jun 01. 2020

언행불일치의 고백



언행일치. 자기가 믿는 신념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자기 자신이 뿌듯할까. 물론 인생의 목표를 그런 걸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사는 모양새가 자랑스러우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실릴 것임은 자명한 노릇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살짝 소름이 끼친다. 자기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 같은 사람. 한 마디로 꼰대 같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 한 일을 자랑삼아 죽 늘어놓고 자신을 본 받으라는 교훈까지 남기는 젊은이를 보면 혐오감이 드는 건 꼰대짓을 연상시키기 때문 아닐까.

이런 경우는 어떤가. 당신이 만약 아이들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주양육자라면 말과 행동이 찰떡같이 들어맞는 본을 보여야 한다고 믿지 않겠는가. 그래야 주양육자로서 본인의 훈육이 먹힐 것이며 조금 더 나아가서는 존경과 감탄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자식들의 존경과 감탄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기왕이면 부모인 나를 좀 존경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진 않겠다.

어쨌든 언행일치가 어려운 일인 건 맞다. 오죽하면 공자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얘기가 되었겠는가.(아닌가? 공자님이 강조 안 했나?) 나도 가능하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싶지만 잘 안 될 때가 많다. 아이들한테 규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규칙이라는 게 애매모호하기도 하거니와 편의에 따라 느슨해지고 또 때로는 조여지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문묘라는 곳이 있다. 앞서 말한 공자님을 모신 사당인데 평일 낮에 워낙 조용하고 풀도 좀 자라주고 있고 공터도 있고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갔더랬다. 축구에 미친 아이들이 축구할 공간이 없어서 점점 미쳐갈 때라 너무 세게 차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축구를 해도 된다고 일러주었다. 볕 아래서, 나무 아래서 얼굴이 벌개지도록 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오후의 고즈넉한 시간을 즐겼다. 사람이 왔다갔다 할 때는 주의를 주고 야광조끼(내 맘대로 관리자라고 판단)를 입은 사람을 보면 좀 찔리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한 대여섯 번 갔을 때 사달이 났다. 반려견 산책이 금지된 곳이어서 관리하시는 분이 다른 이에게 주의를 주려고 오셨다가 공차는 애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하필 그 때 왜 그렇게 공은 잘 찬 건지. 고즈넉한 사당에 축구공이 정말 제대로 뻥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관리인에게 제대로 딱 걸린 것이다. 주의를 받은 후 사과를 하고 재빨리 공을 챙겨 나오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공자님, 죄송합니다. 언행일치를 못했어요. 아이들 눈치도 보였다. 모냥 빠지게 편의에 따라 행동하다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양육자로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얘들아, 근데 왜 공자님 모신 사당에서 공차면 안 되지? 이상하지 않냐?

축구할 장소를 또 한 번 잃어버린 아이들은 ‘그러게. 왜 그런 거지?’ 한다.

공자님이 너네 축구하는 거 보면 재밌어 할 것 같은데 말야. 공자님도 맨날 누워 계시면 심심하지 않겠냐.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나 말이다. 아이들이 서로 싸울 때 보면 나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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