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의 <흰머리 휘날리며>를 읽고
그러고 보니 3년도 더 된 얘기다.
‘내일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정도의 심상한 말투에서 시작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안하는 마음이 가볍다고 느꼈기에 ‘그러지 뭐!’ 정도의 간단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니 신중하게 대했어야 할 제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무의식에나 걸쳐있던 감정에 이끌려 직관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는 걸 몰랐다. 그보다 무지했던 점은, 그 대답이 이후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것. 사람이 이렇게나 한치 앞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3년이 넘는 시간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명목하에 모였으나 어쩌면 말하기 실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다나 떠는 자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수다만큼 중요한 활동이 또 있을까 싶다. ‘수다’라는 단어 안의 폄하하는 듯한 뉘앙스는 간단히 무시해도 될 정도로 중요하다.
3년 넘는 시간동안 개인적으로도, 모임 구성원들에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해오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남겼다. 개인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로 인해 병원에 누워 통증 때문에 울었던 일은 사라지고, 따뜻하고 연결된 느낌이 그저 좋아서 울었던 기억이 덧칠됐다. 모임을 하는 동안 글쓰기 모임이라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글을 써오는 빈도나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40개월의 시간을 존버할 수 있었던 데는 함께 하고 있다는, 연결돼 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구성원 다섯 명이 대체로 비슷한 또래라 이야기의 주제는 종종 건강과 돌봄에 관한 쪽으로 흐르기 쉽다. 특히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같(은 것으로 믿고 있)기에 노후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생각을 공유할 때가 많다. 전에도 한 번 풀어놓았던 적이 있듯 내 경우는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하는 목표 혹은 노후 계획이 있기에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즐겁다. 세부적인 실행 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적은 안타깝게도 없다(계획덕후의 약점). 그러니 함께 해줄 사람, 특히 현실적인 면이 발달한 사람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보다보니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노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가 화면에 잔뜩 떠 있다. 그런 영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장면인데 왜인지 이해가 좀 안 가기는 하지만 확실히 동기부여 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그러니 내 계획 속의 공동체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마음 맞는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면서 살 수 있다면, 공간의 크기나 편리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러다보니 나이를 먹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그리 두렵지 않다. 다만 한 번 크게 아팠던 사람이라 병드는 것은 두렵다. ‘어르신’이 되는 것이 두렵지 않지만 ‘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가 들어 청년들 앞에서 ‘라떼’나 찾아가며 침 튀기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60이 넘는 나이에도 팽팽한 피부와 탄탄한 몸을 자랑하며 ‘동안’이나 ‘안티 에이징’의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일상의 모든 것이 젊고 탱탱한 육체를 유지하는 데만 몰빵돼 있다면 노년이 되어서도 굉장히 납작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러기에 ‘동안’은 이미 늦어버린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고미숙 작가의 말처럼 스스로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손녀딸의 남사친에게 눈독들이고 침이나 흘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갈 수 있는, 자기객관화와 성찰이 뛰어난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현재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동지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독서라는 행위가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만한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김영옥 작가의 「흰머리 휘날리며」의 한 문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한한 삶을 사는 모든 역사적 존재는 죽음 속에서 그 삶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증언하며, 바로 그 가치를 참된 것으로 전승하는 것에 이야기의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 이야기가 되지 않은 삶이야말로 버림받은 삶이다. 그 쓸쓸함을 어디에 비견하랴. 그러나 이야기가 되어 전승되는 삶은 사랑의 축복 속에서 우주적 차원의 삶을 지속한다.
p. 137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우리가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하나는 알 것 같다. 오늘의 삶 또한 이야기가 되도록 만들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풀지 말고, 종이 위에 글로 풀어 기록할 것. 글쓰기야말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