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를 읽고
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 엄마는 나를 앞에 앉혀놓고 엄마의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그러니까 나의 아빠 말이다. 엄마의 남편이지만 내게는 아빠이기도 한 남자의 무뚝뚝함과 그로 인해 엄마가 겪는 서운함과 고통. 모든 것을 내게 토해냈다. 처음에는 엄마에 대한 연민으로 그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내게도 눈이라는 게 있으니 아빠의 무뚝뚝함과 무관심 같은 특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매번 반복되는 얘기에 지친 어느 날, 나는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럼 이혼해. 대번에 엄마의 눈빛이 변했다. 너는 딸이 돼갖고 엄마 얘기도 못 들어줘? (지금까지 들어준 건 뭔가) 내가 너희 때문에 어떻게 이혼을 하냐? (내가 괜찮다잖아) 엄마가 바라는 게 이혼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지청구는 배로 들어야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엄마가 식탁에 앉아 한숨을 쉬면 시선을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사춘기의 시작이었고 엄마 딸 시절로는 끝을 의미했다.
나도 결혼해 딸을 낳은 입장이 되고 보니 그 시절 엄마가 바랐던 게 뭔지 이제는 안다. 엄마는 애초에 이혼할 생각은 없으면서 일종의 협박이나 회유책처럼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이었다. 그래봐야 꿈쩍도 안 할 아빠였지만 적어도 그 딸에게만은 어떤 다짐을 심어주는 기능은 했다. 딸을 키우게 되면 절대로 그 애 앞에서 남편 욕은 안 하리라. 엄마의 행동은 일종의 반면교사였다.
아직까지 그 다짐은 잘 지키고 있다. 딸이 아직 어려서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엄마가 그랬던 걸 생생히 기억하는 걸 보니 반면교사 역할은 제대로 할 수 있겠다. 남편에 대한 불만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한심해하면 꼬시겠다 생각도 하지만 그게 아이를 위해서 옳지 않다는 걸 경험상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아빠를 욕하는 나를 보면서 아이가 느낄 감정이 무엇일지 두렵다.
그렇다면 나는 괜찮은 엄마인가. 이건 왠지 그보다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머릿속에 마치 정형화된 ‘다정한 엄마’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고 나와는 먼 그림이기 때문이다. 책을 육아로 배웠고, 학부모 교육 덕후마냥 교육 공지만 떴다 하면 다 신청하는 엄마가 나다. 그 결과 정형화된 엄마의 이미지와 그 근처에도 못 가는 나라는 인간 어디쯤에서 나는 죄책감을 얻었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내 말투에 불만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똑 부러지고 직설적인 화법이 시원시원하다는 평을 들어온 터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육아 책에서 권장하는 “그랬구나. 니 마음이 어땠는지 잘 알겠다”와 같은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억지로 문장을 기계적으로 입에 올려봐야 사춘기 입구에 들어선 아이의 평가는 냉정하다. 엄마 또 무슨 교육 갔다 왔어?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못하고, 칭찬도 거하게 못하는 엄마다. 대신에 엄마가 하는 칭찬은 진짜 특급칭찬이라는 식으로 아이를 세뇌시켰다. 심리상담가는 내가 어릴 때 엄마한테 그런 식의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이에게도 못하는 거라고 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자연스레 안 나오는 게 우리 엄마 탓이란 얘기다. 과학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모든 게 다 엄마 책임이 되는 건 어쩐지 맘에 안 든다. 설사 근거 있는 얘기라 해도 엄마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도움 하나 없이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한 엄마가 세 명의 자식을 건사하는 일이, 그게 가능한 일인지 도무지 나로선 짐작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가 『얼어붙은 여자』에서 그린 그의 어머니는 이랬다. “어머니는 힘이자 폭풍인 동시에, 아름다움이자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고, 내게 미래를 열어 보여준 분이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확인시켜준 인물이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더구나 그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중요한 건 앞을 보고 나아가는 일이다. 나는 딸애에게 어떤 엄마로 기억될 것인가. 등골이 서늘하다.
* 제목은 김동률의 Replay의 가사 중 한 대목에서 따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