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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정서가 사라진 자리, 염세적 통찰 <부고니아>

영화 <부고니아> 리뷰

by 오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셸을 납치한 테디가 미셸이 외계인임을 확신하는 증거로 그녀의 외모에 대해 말한다.

그 얼굴이 어떻게 45세냐고.

미셸은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관리를 잘 해서”라고 답한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외계인이라는 증거는 못 된다는 식이다.

우리나라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헐리우드 리메이크작인 <부고니아>는 전작의 설정에서 몇 가지 사항(납치 피해자와 조력자의 존재 등)을 변경했을 뿐 중심 내용은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물론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스타일이 가미돼 전작과 달리 B급의 정서와 블랙 코미디의 요소는 확연히 덜어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지구를 지켜라>를 ‘저주 받은 걸작’이라고 표현하는 시네필들이 좋아할만한 변화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 전체에서 풍겨오는 B급 정서, 블랙 코미디의 요소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고 장준환 감독을 주목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부고니아>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 보다 훨씬 잔잔하고(란티모스의 스타일) 고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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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권력, 자명한 계급 차이


어쨌든 납치범과 피해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뒤틀려 있고, 계급 관계는 묘하게 작동하고 있다. <부고니아>에서는 그 부분이 훨씬 증폭되어 납치범인 테디보다 피해자 미셸이 훨씬 더 정돈되어 있고 논리 정연한 말을 구사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 두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침 루틴을 하는데 테디의 일상에 비해 미셸의 일상은 잘 짜여져 있고, 전문적인 관리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냥 보기에도 테디와 미셸이 붙으면 미셸이 이길 것 같다. 그건 신체적인 능력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납치범이 설득 당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발에서도 밀린다. 그러기 전에 테디는 자리를 피해 버리긴 하지만.

거대 바이오 회사의 CEO인 미셸과 그 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테디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지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납치를 당해서 감금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미셸과 테디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걸 넘는 방법은 전기 고문과 같은 물리적 폭력일 뿐이다.

적어도 <지구를 지켜라>의 강만식은 나쁜 놈 같았다. 병구가 외계인의 첩보 활동이라고 오해했던 여러 가지 나쁜 짓들이 관객의 눈에는 병구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기도 했으니까. <부고니아>에서는 그런 면이 조금 약해진 것 같다. 테디의 어머니 문제가 얽혀 있긴 하지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미셸의 태도에 신뢰가 간다. 어쩌면 이 결말이 해피 엔딩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하게 되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에서 <부고니아>가 주는 영화적 메시지가 약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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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 버블이 우리를 멸망케 하리라?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의 개봉 사이, 과학기술은 발전했고 미디어의 진화와 소비 방식의 변화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그 중 하나가 영화에서 나오는 ‘필터 버블’의 문제인데, ‘인지편향의 오류’에 대한 메시지는 생각해 볼 지점을 제공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 미셸이 인류의 종말을 결심할 때 지구의 모형 버블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필터 버블에 대해 감독이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너희 인간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납치 피해자가 진짜 외계인라는 것, 그 뒤에 이어지는 지구의 종말이 주인공(병구)이 죽어가면서 본 환상이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부고니아>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쪽에 더 가까워진 게 아닌가 싶다. 미셸이 지구 모형을 내려다보며 짓는 표정이 묘했다. 지구를 대상으로 한 실험의 실패, 인류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괴로움을 담고 있는 표정. 여러 면에서 염세적인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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