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콤한 죄의식

by 오지

차곡차곡 포개진 단면을 세로로 자른다. 바삭한 질감의 겉 껍질이 조금씩 떨어지는데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건 나중에 손가락을 이용해도 되니까. 중요한 건 단면의 층을 지키면서 적당한 두께로 바르게 자르는 것. 그렇게 한 조각의 죄의식이 내게로 온다.

포크를 세로로 세워 조심스레 한 입을 떼어낸다. 들큰한 커피향이 코를 자극하고 동시에 입 안의 모든 미뢰를 일어서게 만든다. 입 안에 작은 조각을 넣으면 바삭한 겉 껍질이 잘게 부서지며 질감이 주는 불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연달아 나를 안달나게 만드는 건 크림의 질감. 한낱 크림에 인생의 달콤함과 씁쓸함, 부드러움과 무자비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자극 안에서 나란 존재는 너무나 무력하다.


익히 아는 맛이 무서운 법이라 했다. 나폴레옹제과점의 롤케이크 ‘구로칸토 슈니탱’의 때깔을 보자마자 침이 고이는 걸 피할 방법을 나는 모른다. 아무리 전날 밤에 ‘내일부터는 단 거를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별 소용 없는 짓이다. 아는 맛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란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간식을 자제하고 안 하고를 고민한다는 사실이 하찮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인생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기껏해야 뱃살에 기름기 한 스푼 더 보탤 뿐인 걸.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이런 고민이 는다는 점에 있다. 기왕이면 “사느냐 죽느냐” 류의, 좀 더 철학적인 고민이면 좋겠는데 ‘직장인의 점심 메뉴 고민’만큼 치열한 게 또 어디 있겠나 싶은 거다.

어쩌면 태도 문제인 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도파민 분비가 하루의 질을 좌우하는 나 같은 사람이 좋아하는 간식을 어떻게 지나치겠나. 아무리 ‘길티 플레저’라지만 이름마저 마음에 드는 것을 어쩌겠나.

그러자니 매일을 수도승처럼 사는 게 좋을까 싶다. 요즘엔 ‘육각형 인간’이니 ‘갓생’이니 하는 청년들도 많던데. 그들의 하루가 보람차긴 하겠지만 그게 구로칸토 슈니탱을 상쇄할 만큼일지 도무지 모르겠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걸 참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성공하는 데는 지름길이긴 하겠다. 하지만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조건을 갖는 건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돈이나 권력을 얻는 게 성공이고 행복일 테지만 누군가에겐 지금 이 순간의 얄팍한 도파민 충족이 행복이 아닐까 싶은 거다.


아니다. 이건 그냥 개소리다. 그저 평생 때를 놓치고 후회만 남은 사람이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구로칸토 슈니탱을 정신줄 놓고 퍼먹다가 건강이고 나발이고 다 놓치게 될 수도 있는 게 현실이 보여주는 냉엄함이다.

그러니 균형 감각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는 일상이 이런 식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이다. 가끔 줄에 서 있는 균형 감각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질러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땅에 떨어지기 전에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장 지방과 바꿔 먹은, 달콤한 죄의식을 다루는 법이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B급 정서가 사라진 자리, 염세적 통찰 <부고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