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
상처를 줄 때 의도는 별 관계가 없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 같은 이름의 상처가 꼭 같은 상흔을 남기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연민은, 의도는 그렇지 않겠지만 때로 조롱만큼 아프다. 그러니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다면 좀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접근해야 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위로의 말은 “가해자를 용서해야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진다”는 말이었다. 용서가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여러 번 곱씹어 봐도 용서는 권력 관계를 전제로 한다. 피해자라고 해도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역학에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권하는 일은 위로나 조언이 아니라 폭력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 미도가 주인에게 묻는다. 남들은 그냥 다 하는 거 같은데 너만 안 되는 거 있냐고. 주인이 그런 게 있나 망설이는 동안 미도가 답한다. 난 있어, 용서.
백 번 동의한다. 자기를 성폭행한 친부를 용서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이 생긴다.
대체 왜 용서를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을 끌어안고 사는 게 힘드니까?
그럼 용서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어진다. 이른바 용서라는 걸 하고 나니 모든 아픔이 말끔히 정리되고 트라우마도 안 남았는지. 주변에 용서가 가능했다는 말을 한 사람이 없어 의문은 여태 해소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과 지지고 볶고, 서로 발톱도 드러내고, 같이 웃고 울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픈 거 다 아는 가족들이랑 억지로 재미있는 시간도 만들어 가면서. 물론 누군가(아빠)는 그 과정을 회피하고 산 속에 처박혀 살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하산할 날도 올 것이란 말이다.
피해자가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사는 동안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걔 정말 그런 일 당한 사람 맞냐고.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피해자성 강요’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는데 인생이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고 밥도 먹고 웃고 연애도 하면서 사냐고.
그런 폭력 앞에서 일상의 디테일은 사라진다. 주인이가 연애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사과를 싫어하면 성폭행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 하고, 성폭행 생존자의 인생이 왜 멀쩡한지 의아해 한다. 그런 얼굴 앞에서 생존 의지는 한풀 꺾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누구는 뭐 대단한 의미나 이유라도 있어서 살고 있는 건지 묻고 싶어진다. 그냥, 사는 거다. 험한 일을 당했어도, 용서 같은 거 못했어도, 가끔 상처가 덧나서 허덕여도. 세차를 하는 동안 날 것의 감정을 토해내고, 마술 같은 판타지에 몰두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꼬마 누리처럼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발화의 순간은, 그것이 세차장이든 마술이든 알코올이든 간에, 꼭 필요한 법이다.그냥 버텨, 가끔 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