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멸렬한 변화를 견디는 법

병오년의 뜨거운 불길 앞에 선, 어느 '삽질 끝판왕'의 고백

by 오지

아무리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투덜대도 12월이면 곳곳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이고, 캐럴이 울려 퍼진다. 명동이나 종로 등 사람 많은 거리에 가면 듣게 되는 구세군의 종소리도 한 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다. 누군가에게는 설렘일 수도 있는 종소리가 내게는 올해가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처럼 들린다.

올해가 끝난다는 건 내가 곧 한 살을 더 먹는다는 뜻이다. 어떤 때는 앞자리 수가 바뀌는 대 전환의 시기.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아, 하루하루 죽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조바심이 난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으로 나이만 먹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한 해가 시작할 때 적어 내려갔던 리스트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엔 자괴감이 고스란히 남는다. 반복해 겪다 보면 무뎌지는 감각도 있기 마련이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는 해가 갈수록 더해가는 것 같다. 나이와 함께 켜켜이 쌓이는 나이테처럼 징글징글하게 얽혀 있다.

계획을 세울 때는 즐겁다. 자타공인 계획 덕후다 보니 계획 단계만큼 설레는 일은 없다. 게다가 안전한 실행은 없다. 실행에서 겪어야 하는 온갖 불안과 두려움을 굳이 계획할 때 불러올 필요는 없으니. 그렇게 실행은 더디고 어려운 일이 된다. 굳이 타인에게서 촉발된 어려움이 아니라 해도 내 발목을 가장 강하게 그러 쥐는 건 나다. 그런 식으로 올해, 을사년을 보냈다.


내년은 병오의 해. 뜨거운 화의 기운이 폭발하는 시기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든, 부정적이든 긍정적인 방향이든, 분출이 되는 해가 될 것이다. 무대에 올려져 조리 돌림을 당하게 될 수도 있고, 무대에 선 연사로 좌중을 휘어 잡을 수도 있는 해. 게다가 출판사를 내고 새 책을 기획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음 편히 연말연시를 즐기기가 어렵다. 인생에서 저질렀던 수많은 삽질 중 최대 끝판왕이 내년에 펼쳐질 판이니. 개인적으로도 병오년이 어떤 해가 될지 기대 반 걱정 반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갑작스런 변화가 과연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보다 변화가 어려운 존재이고. 게다가 변화의 과정은 생각보다 지리멸렬하다. 경험상 그렇다. 변화를 감지하는 건, 생각 한 자락의 끝에서 스며들듯 알게 된다. 그래도 내가 조금은 성장했구나, 달라졌구나.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다면 명리학상으로도 좋은 건 아니다. 그럴 때 딱 급살 맞기 좋다고 할까. 어느 모로 보나 급작스럽고 현격한 변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성장과 변화를 바라는 시기. 나는 또 한 해가 가고 있음을, 내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럴 때마다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조바심은 내가 아직 멈추지 않았음을 알리는 가장 시끄러운 신호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결국 그 감정을 떠안고 살아가는 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나 개인이 져야 할 몫. 내가 가진 그릇만큼의 불안을 안고, 한 해의 시작을 흔들리는 동공으로 목도한다. 부디 돌아오는 병오년에는 그릇이 조금 더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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