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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인간 서울러의 서울 나들이

연극 '꽃의 비밀'을 본 이야기

by 윤윤

올 해를 시작하면서 했던 야심찬 계획.

나 궤도인간! 안 해본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안 해 본 일을 했나? 하긴 했지. 전신 마취 껄껄.


그것 빼곤? 또 궤도인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의 고등 입학. 느닷없이 시작된 나의 휴직 생활.

일을 쉬면 좀 한가할 줄 알았는데 집에서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엄마로서 받아줘야 할 것도 너무나 많고 챙겨야 할 것 돌아서면 싱크대에 한가득 쌓여 있는 그릇과 음식물.

씻고 봉두난발을 하고 거울을 보면 흰머리 송송 할머니가 똭!

하아...

어느날 문득 예능을 봤는데 어떤 여배우가(난 보통 남배우에 반하는데)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넋을 뺏긴듯 봤었다.

그래서 그 배우가 나온 연극을 덜컥 예매했었다.

나 잠깐 집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머리에 꽃 꽂을지도 몰라.


연극을 예매하고 기다리는 일은 문득 설렜다.

술 마시고 "어~많이 먹었다" 하며 잠드는 고장난 비디오 같은 반려인간을 보다가도

잘 지내다가도 나한테 맡겨 놓은 듯 짜증내는 아이를 얼마나 힘들꼬 하는 보살의 심정으로 바라보다가도

봄에 날씨를 못 맞춰 두꺼운 패딩을 입고 분리수거를 억척스레 하는 날 발견하다가도 설렜다.


아 나 주말에 나와의 약속이 있었지? 하면서 말이다.


남편한테는 결혼식이 있다고 거짓말 했다. 그냥 왠지 연극보러 간다는 말을 하기가 그랬다.

주말에 나만 쏙 빠져 나 좋은 일 하러 가는게 눈치 보였다.

"나 작년에 친했던 젊은 동료가 결혼한대. 아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지 오홍홍홍" 하면서

말이다.


연극의 제목은 <꽃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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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니카 역으로 이연희 배우가 나오는 회차를 예매했다.


그런데 그 날 하필이면 고질병인 편두통이 도졌다.

편두통은 한 번 도지면 오른쪽 머리를 하루 점령하고 왼쪽을 하루쯤 점령하며 나를 다 늙히고야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 하필 그날이 점령군이 오는 날이었다.

편두통이 시작되면 눈을 자꾸 감게 된다. 토할 것 같고 머리를 어디 기대지 않으면 손이 떨리는 것 같다.

하지만 꾸역꾸역 나는 혜화역에 도착했다.

그날은 너무나 추웠다. 다시 겨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혜화!라니 말만 들어도 뭔가

"마음 울적한 날엔~ 거리를 걸어보고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해도 보고~" 하는 노래가 절로 나오지 않냔 말이지( 이 노래 아는 분들 푸쳐 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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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잔뜩 옹송그리며 올라오니 예전과 같이 티켓을 팔고 공연을 안내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점!


아무도 나에게 연극 공연을 홍보하지 않더라

왜. 왜? 왜 나는 연극 보러온 사람같이 안 생겼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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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연극이라니 극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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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느낌!

연극이 시작되기 전 불이 딱 꺼졌을 때의 그 설렘.

아픈 머리를 지긋이 누르면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 때 나는 주부도 엄마도 아니었다. 그저 설레고 철없는 윤윤이가 윤윤윤윤윤 박수를 치고 있었다. 헤헤~


희한하지

연극은 우리 모두 그렇게 보기로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여기는 이탈리아. 당신들은 남편이 사고로 죽게 된 여인들.

아 제발 보험금을 탈 수 있도록 일이 잘 돼야 할텐데 하는 한 마음 한뜻.


머리가 아파서 가만 있어도 찬 눈물이 주룩 흘러도 입은 웃고 있었더라구.

깔깔 웃고 배우들 표정을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뜨기도 했다.


안 해본 일을 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지하철 기둥에 몸을 기대고 죽은 듯이 와서 진통제를 두 알 털어놓고 기절해버렸지만

앞으로도 또 서울나들이를 해보고 싶었다.


일단 계획해두고 뭐라도 예매하면 가게 되니까.

서울을 좋아하지만 늘 집- 마트- 직장 외에 가는 데가 없었다.

더 늙어서 후회하지 않도록 이 도시를 다녀보고 싶다.


중년의 몸에 갇힌 20대의 영혼이 부끄러워 늘 숨기기 급급하지만

이렇게 글을 쓸 때나 혼자 다닐 때의 나는 나만 아는 청춘이 되는 것 같다.

잠시 행복하다...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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