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초 Feb 13. 2021

<비커밍> 미셸 오바마

사람들의 온기를 잴 수 있을 때, 삶은 훨씬 더 나아진다. 늘 그렇다.

1.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우리가 각자 갖고 있는 자산, 언제까지나 갖고 있을 자산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유한다.


2. 어머니는 내게 일찌감치 글 읽는 법을 알려주었고, 공립도서관에 데려다주었고, 내가 책장의 단어를 소리 내어 읽는 동안 곁에서 들어주었다. 아버지는 시 노동직 공무원들이 입는 파란 작업복 차림으로 매일 출근했지만, 밤이면 우리에게 재즈와 미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3. 우리는 비록 정확한 사연은 모를지라도 아무튼 사연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유념하도록 배웠다. 부모님은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비밀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점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 관용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4. 아버지는 병원을 싫어했다. 불평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저 닥친 일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의연히 감당하는 타입이었다.


5. 그럼으로써—아버지가 신조로 여겨온 생각인데—사람들 대부분은 우리가 정중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라는 가설을 지지해주었다.


6. 부모님은 대화할 때 우리를 어른처럼 대했다.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묻는 질문은 아무리 유치한 것이라도 끝까지 진지하게 대답해주었고 편의상 결론을 서두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7. 두 분은 가혹하지만 엄연한 현실을 설명할 때 어물쩍 좋은 말로 넘기지도 않았다.


8. 요컨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통제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신조였다.


9. 내가 할아버지에게 던진 질문은 어렵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질문이 그 밖에도 많다는 걸 나는 곧 깨달았다. 나도 점차 그런 어려운 질문들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10. 패배감이란 실제 결과가 나타나기 한참 전부터 느껴지는 감정이고, 자기 회의와 함께 증식하는 취약함이다. 그리고 두려움이 그 취약함을 부추긴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11. 우리 어머니는 그저 한결같았다. 쉽게 판단하지 않았고, 쉽게 참견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기분을 면밀히 살폈고, 무엇이 되었든 그날 우리가 겪은 시련이나 성공을 자애롭게 지켜보는 증인이 되어주었다. 상황이 나쁠 때라도 동정은 아주 약간만 표시했다. 우리가 뭔가 잘 해내면 딱 적당한 정도로 칭찬하여 자신도 기쁘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그 이상 지나치게 칭찬하여 우리가 어머니의 칭찬을 바라고 무언가를 하게 되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12. 조언할 때는 냉정하고 실용적인 조언을 주는 편이었다. “선생님을 좋아할 필요는 없단다.” 어느 날 내가 씩씩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자 어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머릿속에는 네가 배워야 할 수학 지식이 담겨 있어. 그 점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렴.”


13. 돌아보면, 어머니의 모든 행동과 말에는 자신이 우리를 어른으로 키웠다는 확신이 조용하고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결정은 자신이 내릴 일이었다. 오빠와 내 인생은 오빠와 내 것이지 어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늘 그럴 터였다.


14. 나는 대학 지원 에세이를 작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엄청나게 지적인 척하지 않았다. 프린스턴의 담쟁이 벽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완벽한 대학생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우리 가족은 대학에 관한 경험이 부족하다고, 아버지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내가 도전한다는 사실, 이것 하나만큼은 내가 소유한 진실이었다. 내 환경을 감안하자면, 도전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15. 심지어 어머니의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 파트너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10대의 사랑도 때로 진실되고 영속적일 수 있다는 건 익히 알았다. 나는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나서 내 전부가 될 남자가 어딘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분명 섹시하고 믿음직한 데다가 몹시 친밀하고 깊게 다가와서 내가 삶의 우선순위를 기꺼이 조정하고 싶게 만들 것이다.


16. 효율적으로 글 쓰는 법,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웠다. 1학년 때 무심코 3학년 수준의 신학 수업을 신청하는 바람에 학기 내내 허우적거리다가 기말 보고서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 가까스로 성적을 구조한 적이 있었다. 썩 좋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힘이 된 경험이었다. 내가 어떤 곤경에 처해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17, 누군가는 주말과 주중을 가리지 않는 맥주 파티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누군가는 높은 학업 목표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고, 누군가는 그냥 게을렀다. 또 누군가는 적성이 통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도망쳤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일은 흔들리지 않는 것, 최대한 좋은 성적을 받는 것,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8. 버락은 진지하지만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태도는 가벼웠지만 생각은 묵직했다. 신기하고 호기심 가는 조합이었다.


19. 그렇듯 특이한 환경에서도 의젓하게 자랐다는 사실은 버락이 그보다 더한 상황에 놓인다 해도 잘 감당해낼 거라는 확신만 강화해준 듯했다.


20. 버락은 완전히 성숙한 인간으로서 내 인생에 들어왔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부터 알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움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진실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일터에서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더 큰 목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구와 바람을 흔쾌히 희생할 줄 알았다.


21. 그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태 친하다는 것은 관계를 오래 유지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그가 강인한 어머니와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은 여성과 그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자신만의 목표와 목소리를 지닌 배우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서는 우리가 상대에게 결코 가르칠 수 없는 점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새로 갖춰주거나 바꿀 수 없는 부분이 있다. 


22. 우리는 둘 다에게 맞는 현대적인 관계를 바랐다. 그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삶을 나란히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것, 그러나 각자의 꿈과 야망을 포기하진 않는 것이었다. 내게는 결혼이 그보다는 좀 더 전격적인 합병이었다. 두 삶이 하나로 합쳐져서 재편되는 것, 가족의 안녕이 어느 한 사람의 목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23. 아직 어디로 옮기고 싶은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소개서를 무수히 써서 뿌렸다. 시카고에 있는 각종 재단, 지역사회 일을 하는 비영리단체, 대학 등 곳곳에 보냈다. 수신인은 그 조직의 법률 부서로 지정했는데, 변호사로 일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쪽 사람들이라면 내 이력서를 더 유심히 봐줄 것 같아서였다. 고맙게도 많은 사람이 답해주었다. 당장은 채용 계획이 없더라도 점심을 함께하거나 만나라도 보자고 제안했다. 1991년 봄과 여름에, 나는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찾아가서 만났다. 새 직장을 찾는 게 목표라기보다는 시야를 넓혀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남들은 이럴 때 어떻게 풀어갔는지 배우기 위해서였다.


24. 서약의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정말로 중요하고 내가 영원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맞잡은 손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맞잡은 손은 내게 전에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25.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알고 그것을 사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었다. 필요한 순간에는 유머러스하고 겸손할 줄도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허풍쟁이들에게 동요하지 않았고 자신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26. 그런 사람이 남을 휘갈기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아마도 묘비에 “인생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것” 같은 말을 새기고 싶어 할 어머니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유념할 점은 상대의 모욕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그때는 정말 상처가 된다.



27. 내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규정하지 않으면, 남들이 얼른 나 대신 나를 부정확하게 규정한다.


28. 버락은 종종 자신이 백악관의 계단을 오르겠다는 꿈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리틀록 나인이 센트럴 고등학교의 계단을 오를 용기를 냈던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속한 역사의 모든 연속성 중에서도 이것이야말로 아마 가장 중요한 연속성이었다.



29. 가끔은 집안의 모든 일이 남성 가장의 욕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옛 시절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이었고, 딸들이 그런 상황을 정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텐데 싶었다.



30. 사람들의 온기를 잴 수 있을 때, 삶은 훨씬 더 나아진다. 늘 그렇다.



31. 이들은 자신에게 씌워진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애써야 할 것이고,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얻기도 전에 남들이 마음대로 자신을 규정하는 현실과도 맞서야 할 것이다. 가난해서, 여성이라서, 유색인종이라서 남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현실과 싸워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하겠지만, 현실은 배움을 이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32. 나는 어둑한 식당에서 작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게 좋다. 늘 좋았고, 앞으로도 늘 좋기를 바란다. 버락은 참을성 있고 사려 깊게 잘 들어주는 좋은 대화 상대다. 나는 그가 웃을 때 고개를 뒤로 젖히는 모습이 좋다. 근심 없는 온화한 눈동자와 상냥한 품성이 좋다. 둘이서 느긋하게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둘 사이의 모든 것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던 뜨거운 여름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33. 사람들과 섞이는 것은 중요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34. 우리는 다들 아이들, 배우자, 일에 희생하는 데 너무 익숙했다. 내가 삶의 균형을 잡아보려고 애쓴 시간을 통해서 깨달은 바는, 우리가 이따금 한 번씩 그 우선순위를 뒤집어서 자신만 챙겨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35. 버락은 ‘팩트 가이’이다 보니, 언제나 덜 보기보다는 더 보는 편을 택했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든 최대한 폭넓고 최고로 근접한 시각을 수집하려 했다. 그것이 설령 나쁜 일일지라도. 그래야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 남들이 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의연하게 서 있는 것. 버락은 그 또한 자신의 의무이며 자신이 선출된 이유라고 믿었다.


36.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느낄 때 아이들 스스로도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가설을 증명해준 일이었다. 내가 늘 믿었듯이, 내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이 되는 일이었다.


37. 그중 크리스털 스미스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말을 건넸다. “네가 참 자랑스러워!” “열심히 하던데!” 자신이 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가끔 “미리 칭찬할게!”라고도 외쳤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앞으로 틀림없이 좋은 선택을 하리라고 믿는다는 뜻이었다.


38.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그러느라고 나까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인즉,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39. 그들이 두 장의 성조기를 작별 선물로 건넸을 때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버락이 대통령이 된 첫날 게양되었던 국기와 마지막 날 게양된 국기였다. 우리 가족이 겪었던 시간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셈이었다.  의사당 앞에 마련된 취임식 무대에 세 번째로 앉았을 때,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이전 두 취임식에서 보았던 역동적인 다양성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의기소침해질 정도로 획일적인 장면, 압도적으로 백인과 남성만으로 구성된 장면이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을 살면서 자주 접했다. 특히 좀 더 특권적인 공간들에서, 내가 유년기의 집을 떠난 뒤 어쩌다 보니 진출하게 된 여러 권력의 장들에서 늘상 접했다. 그런데 내가 직업인의 세계에서—시들리 앤드 오스틴에서 새 변호사를 충원하거나 백악관에서 직원을 고용하면서—배운 바는, 획일성은 더 많은 획일성을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상황에 대응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 한.


40. 이제 생각할 시간이 더 많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있을 시간이 더 많다. 쉰네 살인 나는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도 늘 그러면 좋겠다.



41.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42. 우리 모두에게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우리는 모든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으로 나는 어느 한 번의 선거, 한 명의 지도자, 한 건의 뉴스보다 더 크고 강한 힘을 붙들고 있으려고 애쓴다. 그 힘은 바로 낙관주의다. 내게 낙관주의는 일종의 신념이자 두려움에 대한 해독제다. 낙관주의는 우리 가족이 살던 유클리드가의 작은 집을 지배했다. 


43.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소다.


44. 어머니는 늘 내 반석이었고, 내가 타고난 나 자신일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면서도 현실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다. 어머니가 내 딸들을 한없이 사랑해주고 기꺼이 자신의 일보다 우리의 일을 먼저 봐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이 집에서 안전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믿고서 편하고 든든한 기분으로 세상에 나갈 수 있었다.


45. 이제 나는 내 인생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세라를 신뢰한다. 그녀가 탁월하고 호기심 많은 정신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긴 우정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그들의 포옹은 나를 기운차게 해주었고, 가장 힘든 시기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내게 희망을 품을 이유를 안겨준 그들에게 고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