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 쓰면서 고생하기
2019년 11월 27일. 이상한 나라에 떨어졌다. 창이 공항에 처음 발을 댄 순간 든 두 번째 생각이었다(첫 번째는 '집에 가고 싶다'였다). 열아홉, 내게 해외의 첫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해외로 졸업여행을 계획하는 것은 그다지 희귀한 일은 아니었고 나도 졸업 여행 계획을 세우는 고3 중 하나였다. 대개는 가까운 일본이나 패키지로 가기 좋은 유럽으로 많이들 결정하는 듯했지만 나는 싱가포르로 목적지를 정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치안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오래 연락을 주고받은 펜팔 친구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11월 말)에 비슷한 경제 수준으로 여행을 함께 해줄 친구가 없었기에 혼자서 가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직업 교육을 받으면서 나오는 지원금을 조금씩 모은 돈과 어머니께서 보태주신 30만 원까지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정도의 돈이 모였다. 이걸 가지고 과연 여행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가능했다(심지어는 돈이 남아서 다시 환전하기까지 했으니까). 3박 5일이라는 굉장히 짧은 여행이었기 때문에 비행기는 무조건 직항. 여행사에서 이벤트로 풀린 대한항공의 왕복표값이 58만 원이었다. 숙소는 돈을 아끼기 위해 2박은 호스텔, 나머지 하루는 비교적 저렴한 호텔에서 머물렀다.
나의 첫 여행은 처음부터 고생과 고민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도착하고서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공항 안을 빙빙 돌았다. 같은 자리를 수십 번 돌다가 일단은 입고 온 두꺼운 옷을 싱가포르 날씨에 맞게 갈아입기로 했다. 밍기적 거리면서 옷을 갈아입고 셔틀버스로 다른 터미널로 옮겨갔다가 MRT(싱가포르의 지하철)를 타고 시내에 나오니 해가 뜨고 이른 아침. 체크인을 할 수도 없는 시간에 심지어는 계획도 뭣도 없었다.
여행을 위해 준비해온 것이라고는 비행기표, 숙소,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입장권, 리버 크루즈 탑승권, 여행자 보험, 현지 USIM, 환전한 돈이 전부였다. 철저한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그렇다. 솔직한 말로 비행기표, 숙소 예약, 돈.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여행 준비는 끝이 아닌가? 거기에 티켓까지 2개 더 준비하다니,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이 완벽하게 계획적인 여행임을 의심하지 않았었단 말이다. 아무튼간에 무작정 시내에 나오니 배가 고파 뭔가를 좀 먹기로 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대부분의 식당은 오픈 전이었고, 맥도날드로 홀린 듯 들어갔다.
무인기에서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았다. 이때까지도 무인 결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문 후에 카운터에서 현금을 지불해야 모든 주문이 완료된다. 돈을 내지도 않고 미련하게 5분가량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서 음식은 언제 나오나 싶었다. 뒤늦게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쭈뼛쭈뼛 카운터로 가 계산을 마칠 수 있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햄버거를 먹으면서 뭘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물론 소용은 없었다. 딱히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기를 포기하고서는 주변을 슥 둘러보는 걸로 만족했다. 직원 한 분이 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바닥이 젖어 있으니 조심하라는 노란색 표지판을 세워두더라. 그 표지판이 내게는 꽤나 생소하게 보였다. 한국에도 많이 사용되어야 할 텐데 라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두 번째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트레이를 치우지 않고 그냥 나가버리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 이유이다. '분명 저 앞쪽에는 트레이를 치울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는데 왜 사람들은 치우지 않고 그냥 나가는 거지? 원래 싱가포르는 그런가?'. 한참 고민하다가 펜팔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봤지만 이른 아침이었기에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반쯤 체념하면서 '어차피 캐리어에 어색해하는 모습이 외국인 여행자라는 걸 보여주니 좀 어색하게 굴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트레이를 정리하고 나왔다. 나가는 길에 직원 분이 웃으면서 인사해주시는 모습에 용기를 얻으며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후에 친구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정리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 치우지 않고 가는 사람들이 매너가 없는 거라고.
배도 채웠겠다 부기스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색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부푼 감정도 잠시. 겨울이 시작되고 있던 한국과는 다르게 여름 날씨로 더운 싱가포르에 꽤 빨리 지쳐버렸다. 밤 비행이 생각보다 너무 불편해서 몸이 피곤한 탓도 있었다. 예쁜 건물이나 맑은 하늘의 화창한 날씨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캐리어만이라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친구가 내가 묵을 호스텔에 전화 문의를 해 짐을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해주었다(내 유심은 데이터만 이용이 가능해서 전화는 불가능했다). 체크인 전에도 짐은 맡길 수가 있다는 대답에 무한 감사를 전하면서 호스텔에 가 짐을 맡겼다.
혼자서 어느 정도 부기스를 둘러본 다음에는 친구의 학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간단한 학교 투어와 함께 내부의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얻어먹고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스터디를 하는 동안 나는 근처 소파에 앉아서 낮잠을 잤다(다들 불편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일단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느지막한 오후쯤에는 시원한 스무디를 마시러 한 음료점을 찾았다. 컵에 적을 이름을 물어보는 직원에게 YUN(윤)이라고 알려주었지만(풀네임은 한국인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마저도 어려웠는지 결국에는 메뉴 이름으로 호출해주더라. 시무룩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는 영어 이름이 필요한 걸까 싶었다.
이후에는 호스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먼저 마쳤다. 보증금을 지급하고 호스텔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에 락커 열쇠와 객실 비밀번호를 안내받고 숙소를 짧게 둘러봤다. 그다음 다시 밖으로 나와 리틀 인디아, 무스타파, 멀라이언 파크 순으로 친구의 가이드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어둑해진 하늘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싱가포르의 진 면모는 밤에서야 드러나는 것임을!
멀라이언 파크의 야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반짝거리는 도시의 불빛이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예약해둔 리버 크루즈 티켓을 끊고 당장이라도 강 위를 떠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일을 위해 꾹 참고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벌써 늦은 밤이었다.
지친 몸을 씻기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하루 동안의 여정을 곱씹었다. 몸이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싱가포르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핸드폰 갤러리를 수십 번 다시 돌려봤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풍경이 담긴 사진과 영상들에 가슴 언저리가 몽글몽글해지는 기분. 몸이 힘든 것도 잊고 한참 뜬 눈으로 침대에 뒹굴거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다음날을 기약하며 잠이 들 수 있었다. 첫날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