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졸업여행 둘째 날
둘째 날은 느즈막한 아침에 잠에서 깼다. 호스텔에 준비된 조식을 챙겨 먹고 객실 발코니에 앉아서 여유로움을 만끽하다가 문득 전날 무스타파에서 사 온 두리안 초콜릿이 생각나서 냉큼 갖고 다시 발코니로 나왔다. 두리안에 대한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나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싱가포르에 가면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진짜 두리안을 먹어보기 전에 가볍게 시도해보자는 마음으로 산 초콜릿이었다.
포장을 열자마자 상상도 못 한 냄새가 널리 퍼졌다. 새끼손톱의 절반도 되지 않는 양을 베어 먹자(거의 긁어먹은 수준이었다) 그 향이 입안에 화하게 퍼졌다. 향이 어찌나 강했던지 몇 번이고 양치질을 해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가 객실 안에 퍼지지 않도록 빠르게 비닐봉지로 둘둘 감아 봉인했다. 인생에서 그렇게 긴박했던 적이 없는 듯싶다. 진짜 두리안도 아니고 겨우 초콜릿이었는데. 봉인된 초콜릿은 친구에게 건넸다.
오늘의 목적지는 가든스 바이 더 베이.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날이 흐리고 간간히 비가 내리기도 해서 실내가 제격이었다.
연말 분위기는 여기서도 계속되었다. 특히나 난쟁이 산타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트리 같이 커다란 구조물들은 어떻게 운반해서 들여놓는 건지 궁금하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둘러봤다. 원래의 계획은 크리스마스 당일을 싱가포르에서 보내기였는데 예산이 부족해 실패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나는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보면서 버킷리스트에 ‘외국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를 슬쩍 추가했다. 특유의 설렘 가득한 분위기에 외국이라는 점까지 더해진다면 정말 최고의 연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점심에는 구석에 위치한 푸드 코트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 일반 식당보다 로컬스럽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사람도 많이 없어 한적했다.
싱가포르에서 꼭 먹고 싶었던 칠리크랩 세트와 호펀이라고 하는 면 요리를 주문했다. 개인적으로는 칠리크랩 보다 호펀이 더 취향이었다. 중국 당면 같이 생긴 납작한 면도 좋았고, 소스도 굉장히 맛있었다.
식사 메뉴와 함께 옆에 있던 음료 판매점에서 처음 보는 음료도 주문했다. 신기했던 싱가포르의 문화였는데, 음료는 디저트 개념으로 식사 후에 마시는 한국과는 달리 식사를 하면서 음료를 함께 마신다고 한다. 너무 달고 디저트의 느낌이 강해서 나는 식사 도중에 마시는 게 조금 힘들었다.
식사 도중에 고양이가 다가와서 한참을 놀았던 것 같다. 만져주고 손 씻고 와서 다시 밥 먹다가 다시 만져주고. 세계 어딜 가든 고양이의 귀여움은 배신하지 않는다.
식사 후에는 기념품샵에 들려 싱가포르 슬링 한 캔을 사고 1달러 동전으로 기념 동전을 만들었다. 싱가포르 슬링은 관람차를 타면서 안에서 마시고 싶었지만 하필 관람차가 운행을 하지 않는 기간에 방문해서 기념품샵에서 사마셨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야경투어가 시작됐다. 먼저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불이 켜지길 기다리다가 야경을 구경하고 (레이저쇼는 아쉽게 보지 못했다) 리버 크루즈를 타러 이동했다.
싱가포르에서 최고의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단연 리버 크루즈라고 말할 수 있다. 강 주위로 라이브 바와 펍이 즐비해 있어 노랫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클락키의 시끌벅적한 밤 분위기가 굉장히 로맨틱했다.
반짝거리는 야경을 배 위에서 둘러보는 나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이제껏 한국에서 봐온 야경이라고는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거리며 전혀 조화롭지 못한 색으로 빛나는 유흥가라던가 지친 얼굴로 가득한 학원가의 불빛이 전부였다. 그러니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싱가포르의 야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지금에도 눈앞에 아른거리며 당장이라도 싱가포르의 밤거리를 걷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