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인간은 실패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 같다. 헤어지기 위해 만나고, 좌절하기 위해 소통하고, 실망하기 위해 매혹되고, 떠나오기 위해 머무르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것만 같은 삶을 산다. 영원 같은 순간은 ‘한동안’ 지속될 뿐, 고래로 시간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공간도. 이강현 감독의 영화 <얼굴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좌표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몸짓, 마음, 그리고 그들의 공간을 섬세한 영화적 감각으로 포착한다. 그 중심축에 주인공 기선(박종환)과 혜진(김새벽)의 일상이 있다. 기선은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으로 학교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졸업앨범에 넣을 학생들의 사진을 프로젝트 화면으로 살펴보던 그. 마우스 클릭과 함께 차례대로 넘어가는 화면 속 소년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똑같은 교복에 비슷한 헤어 스타일인지라, 하나의 몸 위로 얼굴만 바뀌는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렇다 할 특색 없는 수많은 얼굴들 중 유독 한 얼굴에 기선의 시선이 가 꽂힌다. 3학년 축구부 진수의 얼굴이다. 그의 무엇이 기선의 마음을 건드린 것일까? 그때부터 기선은 진수가 궁금하다. 혜진은 엄마의 식당일을 돕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그 퇴직금으로 가게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다. 그녀가 얼마 전 떠나온 곳이 직장 만은 아니다. 야심 차게 새로운 식당 운영방안을 논하던 그녀가, 다음 쇼트에서는 옛 연인과 얼마 전까지 함께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있다. 그녀의 옛 연인은 기선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헤어진 상태인 기선과 혜진, 두 사람 각자의 일상이 서로 다른 리듬과 호흡으로 따로이 전개된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둘은 다시 마주쳤다가, 긴 시간 공백을 훌쩍 뛰어넘어 이전과 다른 시공간의 좌표 위를 살아간다.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시간의 힘은 압도적이어서 매 순간이 ‘처음 살아보는 생’인 ‘지금, 여기’에서 인간은 자주 고독하고 혼란스럽다. 더욱 좌절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조차 종종 실패한다는 점이다. 혜진은 이따금 조그마한 좌식 탁자에 앉아 일기를 쓴다. ‘새로운 한 주’,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기약하며 평온한 일상에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일기는 두 줄을 넘지 못한다. 더 이상 쓸 말을 찾지 못하고 펜을 내리며 그녀가 짓던 당혹한 표정, 그녀가 홀로 앉아있던 어둡고 쓸쓸한 방 안의 정취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언어가 그녀 몸과 마음의 풍경을 제대로 실어 나르지 못하고, 그렇게 스스로와의 내밀한 소통에 실패하던 순간이 주던 마음의 울림. 그 순간을 영화는 정확히 실어 나른다. 시간과 공간, 사람의 마음과 상호작용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