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째 시즌, 라이선스 락 뮤지컬 <헤드윅>
작품의 일부 포인트에 집중해 작품을 리뷰합니다. 다른 요소를 고려한 종합적인 평은 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머시브 시어터 : 관객이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수동적으로 감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하는 연극이나 공연을 뜻한다. 우리말로는 관객 참여형 공연 또는 관객 몰입형 공연이라고 부른다. (출처 : 네이버 시사 상식 사전)
이머시브 공연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공연은 <슬립 노 모어>,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 혜성>, <쉬어매드니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등이 있다. (이머시브 공연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예시는 '매거진 더 뮤지컬' 링크 참고) 이머시브 공연의 포인트는 '관객 참여'다. 예시 공연에서 관객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관객이 극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거나 장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참여 정도에 따라 ‘이머시브 공연이 맞다/아니다’를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다. 국내 초연 <그레이트 코멧>의 경우 관객이 극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거나 장면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극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과의 교감을 시도했기 때문에 이머시브 공연으로 불렸다. 단어 이머시브(immersive)는 '몰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가장 몰입했던 공연은 <헤드윅>이다.
<헤드윅>은 2005년 초연후 2021년 13번째 시즌을 마무리했다. 슬프게도 내가 뮤지컬에 입문한 해는 2018년. 따라서 2019년의 12번째 시즌이 나의 첫 번째 <헤드윅>이다. 이 글은 가장 최근 두 시즌에 대한 리뷰다. 2년 만에 컴백한 시즌이지만 두 시즌은 코로나19로 인해 큰 차이를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헤드윅>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누군가 <헤드윅>이 왜 이머시브 공연이냐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헤드윅>은 어떤 공연보다도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헤드윅은 객석 뒤에서 입장해 통로를 따라 요란하게 등장한다. 그러다 꽂히는 좌석 팔걸이 위에 올라타 춤을 춘다. 객석을 한바탕 들쑤시고 무대 위에 올라 관객에게 인사한다. '언니 왔다.', '뭐 볼 게 있다고 이렇게 몰려왔냐' 또는 오늘 객석 분위기에 대한 언급을 하는 등 매일 조금씩 다른 첫인사로 공연을 시작한다. 캐릭터가 무대 위 인물이 아닌 관객에게 가장 처음 말을 건네는 공연은 흔치 않다. 이 첫인사는 관객에게 <헤드윅> 세계관 입성을 알려주는 시그널이다. 인사 후 헤드윅은 '현재 당신들은 뉴욕에 와 있다고*. 나는 이제부터 당신들에게 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관객에게 역할을 부여한다. 관객은 '관객'이 된다. 무대 위 상황과 별개의 현실 시공간에 있는 관객이 아니라, 헤드윅이 공연하는 뉴욕 타임스퀘어 옆 밀레니엄 극장에 온 관객이 된다.
정문성 배우의 공연이었다. 헤드윅이 물었다. "길 건너에서 토미가 콘서트 하고 있는데 이 허름한 자신의 공연장까지 어떻게 왔냐" 어느 관객이 대답했다. "종로3가역에 내려서 왔어요" 헤드윅이 말했다. "여긴 뉴욕인데 무슨 소리야. 그런 역이 어딨어."
<헤드윅>만큼 배우 한 명이 소화해야 하는 대사량이 많은 대형 뮤지컬 공연은 보지 못했다. 공연 내내 헤드윅은 관객에게 말을 건다. 매 공연 고정적인 질문도 있고 즉흥 질문도 있다. 단답형 대답보다 서술형 대답을 요구한다. 관객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애드리브가 달라진다. 관객의 대답이 없으면 민망해하기도 토라지기도 한다. 대화뿐 아니라 관객과의 터치도 많다. 입장 시 관객석 팔걸이 위에서 춤추기, 공연 도중 남자 관객에게 다가가 말 걸기, 앞자리 관객에게 물 뿜기. 크게 세 가지 이벤트(?)가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 관객과의 티키타카에 따라 매일 다른 대본을 가진 공연이 된다.
헤드윅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좌석 구역이 대략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이 구역의 티켓팅 경쟁은 치열하다. 물을 받아내야 하는 좌석은 늘 같은 자리였는데, 상당히 많이 뿌린다. 나중에 이츠학이 휴지를 한 뭉탱이 가져와서 닦아준다. 조드윅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차피 그 좌석 표 못 구하겠지만.
<헤드윅>의 또 다른 묘미는 커튼콜 공연이다. 인터미션 없는 140분이 정식 공연시간인데 애드리브와 커튼콜로 인해 이 시간이 지켜지는 경우는 없다. 공연장 직원은 공연시간이 늘어날 수 있으니 입장 전 화장실 다녀오라고 신신당부한다. 헤드윅과 이츠학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면 공연장은 콘서트장이 된다. 가장 슬픈 마지막 'Midnight Radio'에서 오열하던 관객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립하여 환호하는 모습은 장관이다. 140분 공연이 3시간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헤드윅이 돌아왔다.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으로. 늘 그래 왔듯 헤드윅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야기를 하고, 메시지를 건넨다. 우리는 조금 더 헤드윅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헤드윅의 행동에 집중한다. 보지 못했던 모습이 보인다.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들린다.
이번 시즌의 헤드윅은 무척이나 특별하다. 특히나 헤드윅을 겪었던 관객이라면 굉장히 생경한 느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는 변함이 없다. 단지 소통의 방식이 조금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헤드윅과 함께.
<헤드윅> 프로그램북. 손지은 연출의 글
헤드윅이 이 시국에 공연이 되나? 기대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관객은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을 터. <헤드윅>의 가장 큰 매력인 관객과의 소통이 없어진 <헤드윅>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조승우*가 돌아온다니요, 존재 자체로 매력인 분을 모셨네요. 안 볼 수가 없다.
과거 헤드윅은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나는 대극장보다는 규모가 작은 홍익대학교아트센터에서 처음으로 헤드윅을 관람했다. 홍익대학교아트센터에서 공연을 보면서도 캐릭터와 관객과의 물리적 거리감이 아쉬웠기에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헤드윅>의 몰입감을 한번쯤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극장 공연으로 돌아온 21년의 <헤드윅>, 코로나19로 인해 관객과 대화는 불가능하니 관객과의 물리적 거리감을 확실히 넓히기로 한 걸까. 거리감은 차치하더라도 타임스퀘어 옆 허름한 밀레니엄 극장이 <헤드윅>의 배경인데, 대극장은 허름한 감성과 거리가 멀다. 무명가수의 공연인데 대극장을 채울 만큼 관객이 오다니 세계관에 혼란이 온다.
관객과의 터치도 당연히 없어졌다. 헤드윅은 마스크를 쓰고 통로를 통해 등장해 곧바로 무대 위로 올라간다. 이츠학의 마지막 등장과 퇴장을 제외하고 배우는 공연 중에 객석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헤드윅이 관객을 향해 이야기를 하고 특정 관객을 지목하기도 하지만 관객의 리액션에는 한계가 있다. 헤드윅 혼자서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매일 다른 관객에 의한 매일 다른 공연을 보여주던 헤드윅은 사라졌다. 객석에서 춤을 추고 관객에게 물을 뿌리는 헤드윅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일어서거나 소리 지르지 못하므로 커튼콜 공연 또한 매우 짧게 축소됐다.
대극장에서 공연을 했기에 다행인 부분도 있다. 조승우를 캐스팅하고 대극장에서 공연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치열한 피켓팅 경쟁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었다.
맥주를 흔들어 따는 장면이 있다. 맥주가 앞자리 관객에게 튀었다. 배우가 "원래는 닦아 줬을 텐데 이제는 못한다" 말했다. 마지막 커튼콜에서도 그 관객에게 다정하게 사과를 건넸다. 나도 맥주 맞고 싶다.
<헤드윅>은 락 뮤지컬이지만 즐겁기만 한 공연은 아니다. 헤드윅이 아픔을 극복하는 이야기이고 두 주인공이 스스로를 인정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처음에 친근했던 헤드윅은 점점 감정 기복을 드러내고 짓궂은 행동을 한다. 결국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폭발하고. 새로운 헤드윅으로 나타난다. 장난스러운 애드리브가 난무하는 헤드윅이지만 이 흐름은 잃지 않는다. 과거의 헤드윅은 그랬다.
배우와 관객과의 이야기가 없어진 공백을 채우기 위해 커버곡이 등장했다. 뉴욕까지 진출한 갑작스러운 '범 내려온다'에서 1차 당황, 그 이후로도 2-3곡의 커버곡이 나온다. 신선한 시도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범내려 온다'는 처음 보러 간 날의 애드리브 곡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츠학 솔로 커버곡은 원래 있었다.)
헤드윅은 극의 중후반 무대를 박차고 나간다. 헤드윅의 갑작스러운 퇴장 전까지 그의 감정은 점점 고조된다. 헤드윅이 다시 나타날 때, 분위기는 완전히 전환된다. 이 순간은 클라이맥스 직전의 아주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커버곡이 이 타이밍 전에 몰려있다. 커버곡 도입은 신선했던 만큼 존재감이 컸다. 관객은 커버곡을 듣는 동안 주인공이 보여준 감정선 빌드업을 잊는다. 그래서 별안간 나가버리는 주인공이 당황스럽다. 관객은 미묘하게 드러내던 불안함을 결국 터트려버리는 헤드윅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커버곡이 관객의 이해를 방해했다.
코로나19 덕분에 다양한 곡을 소화하는 배우를 봤다. 좋다. 하지만 <헤드윅>은 가수 헤드윅의 '콘서트'가 아니다. 헤드윅의 '이야기가 있는 뮤지컬'이다. 관객 참여의 한계 보완하기 위해 극의 흐름과 상관없는 새로운 볼거리를 만드는 것보다, 감정선을 따라가며 두 주인공의 성장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니 21년의 헤드윅을 보고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덧붙여,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사 수위가 낮아졌고 이츠학의 역할도 많이 줄었다. 대극장 규모를 의식해 대사 수위를 조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은유적 표현이 많아 발칙함이 덜 하다. 그리고 이츠학과 헤드윅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 본 관객이라면 이츠학의 욕망을 사전에 충분히 파악하기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인생 뮤지컬이 뭐였어요?'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헤드윅>이다. 2021년의 공연이 아쉽긴 했지만 여전히 인생 뮤지컬은 <헤드윅>이다. 2019년 배우의 물음에 소리쳐 대답하지 않은 나 자신이 후회된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내 안의 주접을 똘똘 뭉쳐 리액션해 줄 자신이 있는데. 야속한 코로나19.
▼ 이전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