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일본 다카마쓰 여행기
성화의 여행은 분주하다. 하나라도 더 보는 게 남는 장사라는 생각은 여행지가 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확고해진다. 빡빡한 스케줄에 몸을 맡기면 가장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는 패키지여행은 그에게 가장 편리한 여행 방식이다. 그의 카메라에는 하루에 찍은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러 장소가 기록된다. 직접 찍은 사진으로 블로그를 채우는 것은 10년 차 블로거 성화의 가장 큰 재미다.
“엄마, 아빠, 일본 같이 갈 사람?” 명절에 집에 온 딸들이 일본의 다카마쓰라는 곳에 간다고 했다. "아빠가 살 날이 엄마가 살 날 보다 얼마 안 될 것 같으니, 아빠를 데려가라." 성화의 아내 명희가 말했다. 성화는 딸들의 여행에 끼기로 한다. 그의 첫 자유 해외여행이다.
좋은 시절 다 갔다.
성화는 가이드 없는 해외여행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국내에서도 대중교통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곳은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이라 읍내로 가려면 자차는 필수다. 자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해외에서 관광버스 대절 없이 다니는 것은 성화에게 큰 도전이다.
일본에 도착 후 딸들은 휴대폰으로 익숙한 듯 길을 찾는다. 구글맵이라며 성화의 휴대폰을 열어 설명해 주었지만, 화면 속 도시와 길 이름이 낯설고 확대 축소를 제외한 다른 기능은 조금 어렵다. 버스나 전철 창구에서 도착지, 경로, 시간을 확인하고 직접 티켓을 끊어본 게 언제였더라. 여행지에 도착하면 대중교통 시간에 따라 체류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정류장에서 20-30분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예삿일이다. 몇 곳 구경하지도 않았는데 해가 점점 진다. 길 위에서 시간과 체력을 허비한 느낌이 든다. 이것이 자유 여행이로구나.
성화는 다른 나라 식당에서 고추장을 꺼내고 마는 한국 사람들을 무례하다고 여긴다. 그는 한국에서의 음식 취향은 잠시 접어두고 여행지에서는 현지 음식을 즐기려 노력한다. 후루룩후루룩 들이킨 후 탄수화물로 마무리하는 한국 음식이 익숙한 성화에게 쿠시카츠나 야키토리 등 단출한 음식은 살짝 허전하지만, 우동이며 라면이며 국물이 있는 면 요리는 취향에 맞아 금세 한 그릇을 후딱 비운다. 딸들은 일본 술을 주문해서 홀짝홀짝 마셔댄다. 심장이 안 좋은 성화에게 무알콜 맥주를 주문해 주었다. 무알콜 맥주가 있는지 몰랐는데 나쁘지 않군, 한국에서도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저녁이 되면 협착증이 심해져 성화의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 그의 모습이 피곤해 보였는지 막내딸이 성화를 호텔에 데려다준단다. “좋은 시절 다 갔다.” 호텔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막내딸에게 중얼거린다. 어딜 가도 심드렁한 여타 중년들과 달리, 새로운 곳에서 발걸음이 더 분주해지는 성화이기에, 점점 고장이 잦아지는 몸이 속상하다. 막내딸은 성화를 데려다 주고 다시 술을 마시러 갔다.
저 놈 시키 누구 닮아가 저카노
막내딸은 어릴 때만 해도 산을 좋아하는 성화를 잘 따라다녔다. 국내의 웬만한 산은 물론이고 백두산까지 함께 다녔다. 막내딸에게 성화는 가장 앞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지도를 펼쳐 어디든 자신 있게 걸었고, 가는 장소마다 그곳의 역사를 막내딸에게 설명했다. 막내딸은 이제 성화 앞에서 먼저 걷고, 나오시마의 미술관을 디자인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대해서 시시콜콜 설명한다. 성화의 뇌는 생경한 풍경, 여행 지도, 현지 직원의 일본어 폭격만으로도 정보량 과다다. 아빠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막내딸의 목소리가 성화의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빠져나온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해가 질 무렵 호텔이 있는 시내로 돌아오면 성화의 배터리는 방전된 상태, 둘째 딸은 지치지도 않는지 시내의 마켓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호텔로 들어가도 자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성화는 아픈 허리와 다리를 이끌고 딸들과 함께 시장 구경을 해본다. 하지만 외국인 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게를 어슬렁거리는 행동이 부담인 눈치다. 그는 가게 입구 쪽만 서성이며 뭐라도 빨리 사지 않고 미적대는 딸들을 기다린다. 어린 시절 둘째 딸의 별명은 '장똘뱅이'였다.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을 돌아보느라 집에 늦게 들어와 붙여진 별명이다. 성화는 둘째 딸이 여전히 별명값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섬으로 가는 배편 티켓을 흘렸는데 둘째 딸이 주워주며 또 잔소리를 한다.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직원이 불러 돌아보니 둘째 딸의 휴대폰을 들고 있다. 막내딸은 캐리어를 버스 앞에 내버려 두고 걸어가기도 한다. 누가 누구보고 잔소리를 하는지, “저 놈 시키 누구 닮아가 저카노!” 성화가 외친다. 안타깝게도 성화를 닮았다. 서로 비웃고 놀리며 키득거린다. 안타깝게도 딸들의 놀림과 비웃음 코드 역시 성화를 닮았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뭐라 하지 말자. 그들은 합의한다.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지
딸들이 데려간 곳은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안도 다다오의 지중 미술관, 히로시 스기모토 갤러리, 테시마 미술관이다. 안도 다다오가 누군지 몰랐었는데, 건물 두 곳을 다녀보니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대충 감이 온다. 성화는 그를 "집요하다"라고 표현했다. 단풍 든 산과 건물의 조화가 멋져 성화는 계속해서 카메라를 든다. 카메라에 기록된 사진을 살펴보니 복도의 길쭉한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멋있게 찍혔다. 다시 돌아가 사진으로 찍은 장소를 살펴본다. 사진을 좋아하는 성화지만 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 작품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래도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작가가 왜 이런 사진을 찍는 건지 궁금해한다. 잘 몰라도 열심히 보는 것, 다시 보는 것, 의문을 가지는 것, 성화의 감상법이다.
조그만 섬, 밭으로 둘러싸인 위치에 두꺼비 집 같은 테시마 미술관이 있다. 넓은 공간에 하늘로 뚫린 구멍과 바닥에서 솟아나는 물방울뿐이다. 안에 들어서자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린다. 성화는 둘째 딸 옆에 조용히 앉아 물방울이 솟아나는 구멍을 쳐다본다. 이내 구멍 하나에 집중하더니 물이 나오는 시간과 멈추는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켜보다 규칙이 없음을 깨닫는다. 성화는 조그만 구멍에서 어떻게 물을 불규칙적으로 뿜어내는지 바닥 설비가 궁금하다. 널따란 공간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 천장을 살펴보니 격자로 철근이 지나간 자국이 보인다. 바닥 구조는 알 수 없어도 천장 구조는 파악할 수 있어서 성화는 만족스럽다. 남들이 풀과 새소리, 물방울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양할 때, 그 원리를 궁금해하는 것, 성화의 감상법이다.
유적지나 자연 구경을 좋아하는 성화에게 현대 건축과 예술은 조금 낯선 경험이다. 자료를 찾기 어려우니 예습을 많이 하지 못했다. 블로그에 올려야 하는데 사진 촬영이 안 되는 곳도 많았다. 성화는 집에 돌아가 찾아봐야 할 내용이 산더미다. 섬에 미술관을 짓기로 한 부자는 대체 누군지, 안도 다다오란 사람이 한국에 지은 건축물은 무엇인지, 나오시마와 테시마 섬 말고 다른 섬은 또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궁금해. 모든 궁금증을 찾아 정리해 블로그에 올리고 그 게시물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볼 때까지 성화의 여행은 계속된다.
"날씨가 많이 아쉬웠지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지." 마지막날, 여행의 감상을 강요하는 막내딸에게 남긴 한마디. 성화는 역시 새로운 경험을 기회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