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언젠가 딱 한 번쯤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지금이 적절한 때란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만 쓰기로 했으니, 다시는 쓰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를 여러 번 소비할 수는 없다.
내 지인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안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농담 섞어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사람이 살면서 쓸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데, 나는 걔한테 다 써 버리고 남은 사랑이 없어서 연애를 못 하는 거라고, 결혼을 못 하는 거라고. 그런 농담들에 그는 묻어 있었다. 한때는 그말이 나에겐 진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농담이 아니었단 얘기다.
그와는 2013년부터 연애를 해 2016년 겨울에 헤어졌지만, 내 사랑은 2016년 이후가 절정이었다. 사귀는 동안에도 너무 많이 그를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귀던 기간보다 더 오래 그를 그리워 했다. 그와 헤어진 뒤에 연애 불구가 되었었다. 아무도 필요 없었고, 혹시나 우연히 만날 수도 있으니 늘 혼자여야 할 것 같았고, 어차피 그보단 덜 사랑할 걸 알았기 때문인지 누굴 만나도 시큰둥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난 혼자다. (물론 중간에 정상적인 연애를 한 번 했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건 저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나와 헤어지고 반 년도 되지 않아 새 여자친구를 만났고, 중간에 한 번쯤 헤어졌던 것도 같지만 지금까지 긴 연애를 이어 왔고 얼마 전 결혼을 한 듯하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 뒤였던 2017년은 내가 <그것이 알고 싶다> 라는 프로그램의 작가로 일할 때였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취재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끼리 흥신소를 차리면 떼돈 벌 거라고 낄낄대면서 온갖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전화번호를 찾고 형사들처럼 집요한 뒷조사(?)를 했다. 지금은 그런 재주가 없지만 그땐 어떻게 했는지 SNS를 전혀 하지 않는 그 친구 대신, 이름도 모르는 그 친구 여자친구의 계정을 찾아내 염탐을 했다.
나의 이런 추접스러운 염탐질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사과하고 싶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는데 소식이 궁금해서 그랬다. 다른 여자랑 잘 지내고 있는 소식이라도 아무튼 소식이라면 소식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은 별로 볼 수 없었지만 새 여자친구의 얼굴을 너무 많이 봐서, 나는 길 가다 우연히 그 분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아는 사람인 줄 알고 인사를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실제로 갖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낸 시간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말이 있다. 그건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반대는 어떤가. 한 사람이 왔다 갈 때는, 그 사람만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일생을 떼어내 가지고 간다. 아물어지지 않는 빈틈이 결코 과장이나 착각이 아니다. 정말로 왔다 가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 그 틈을 끌어안고 뗑깡 부리듯이 어리광 부리듯이 지내온 세월이 무려 8년이라니.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가끔 구남친이 결혼하면 정말 기분 별로일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첫 번째 타자가 하필 그일 줄 몰랐고 의외로 기분이 뭣같다기보단 차분히 때가 왔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내 생에 주어진 사랑의 총량이 다 소비된 게 아니라, 저당 잡혀 있던 거라면 이제 해지할 시간이 된 게 아닐까. 지금도 연애에는 쥐뿔 관심도 없지만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차피 그보단 덜 사랑할 것 같아 시큰둥할' 일은 이제 없을 거라는 후련한 기분이 든다.
그가 오래도록 평온하고 행복하길.
그리고 그 시절 찬란했던 나처럼 다시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