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도 사랑

by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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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날씨가 좋은 5월의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종일 쫄쫄 굶고 있었어. 단식 투쟁을 벌이는 중이었거든. 한 때 비글을 키우고 싶었지만 당시에 나는 고양이에 꽂혀 있었어. 하지만 그 마음을 숨긴 채 엄마에게는 토끼를 키우고 싶다고 말한 뒤 엄마를 충무로에 데려가는 것까지 성공했어. 충무로를 자주 지나다녀서 사실 나는 알고 있었지. 충무로에는 토끼가 없다는 걸 말이야.


다른 애들보다 조금 컸지만 여전히 아기였던 너는 다른 애들보다 이미 조금 커졌다는 이유로 쇼 윈도우 맨 앞자리를 뺏긴 지 오래였을 거야. 그래서 우리가 ‘동원애견’의 앞을 지났을 때 운명처럼 눈이 마주쳤다든지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 가게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 나는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던 거야. “혹시 샴 고양이 있나요?”


주인은 그 말을 듣고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하더니 어디에선가 너를 꺼내와서는 다짜고짜 내 무릎에 올렸어. 당황한 네가 버둥거리면서 몸을 뒤집으려고 손톱을 휘두르고, 그런 너를 어찌할지 몰라서 덩달아 당황한 내가 어색한 첫 만남을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주인은 엄마와 거래를 시작한 참이었어. 다른 애들은 보통 2개월 정도인데 얘는 이미 3개월이니까 싸게 20에 해 드리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 엄마가 곤란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어. 그날로 너와 나의 운명이 바뀌었고 너는 내 동생이 되었어. 나는 너에게 샴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 12살짜리가 지은 유치한 이름이 네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너는 한결같이 그 이름에 반응해 주었어.


네가 온 첫날 밤, 기억나? 아빠는 예상치 못한 너의 존재에 조금 화가 나 있었고, 엄마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지. 엄마는 하루 종일 소파 뒤에 숨어있던 너를 내 방에 들여다 놓고서는 여기에서만 지내게 하라고 했어. 나는 그 옆 할머니 방에서 자야 했어. 밤이 되어 이부자리에 누워 10시부터 12시까지 하는 라디오를 끝까지 듣고도 나는 도통 잠이 오지 않았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중문 너머로 너의 작은 실루엣이 언뜻언뜻 보였고 심지어 네가 작은 목소리로 울고 있었거든. 엄마가 분명 따로 자라고 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엄마 몰래 너를 보러 내 방에 들어갔어. 그제야 너는 울음을 멈추고 나한테 아장아장 걸어왔어. 아무도 몰래 우리 새벽에 한참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었잖아.


지금도 나는 할머니 방에 있어. 그때처럼 잠을 못 이루고 있는데 이번에는 시차 때문이야. 그리고 그때처럼 너는 내 방에 혼자 누워 있어. 18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나는 엄마 몰래 내 방에 가지 않는다는 거야.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배웠거든. 나이가 많아도 믿을 수 없게 건강했던 너지만 너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어. 이제 너는 앞을 보지도, 멀리서 나는 소리를 듣지도 못해. 중문을 열어도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그래도 하루에 한 번, 기다림 끝에 내가 너를 보러 내 방 문을 열고 “샴푸”하고 너를 크게 부르면 너는 그때처럼 아장아장, 비틀거리며 한 발씩 힘겹게 나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대답하고 남은 온 힘을 다해 나에게 몸을 비벼. 그 바람에 너는 어제 1년 만에 나를 만나고 나서 컨디션이 되려 나빠졌어. 너무 흥분했던 탓일 까, 하루 종일 자면서 몸을 회복해야 했지. 나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1분도 아깝지만, 너를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지만 중문 너머에서 너를 지켜만 보며 지금도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고생스런 투병 끝에도 살아내고 기적적으로 회복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려 준 것처럼 말이야.


어느덧 너 없이 살아온 시간보다 너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내 인생에서 훨씬 길어졌어. 가장 힘든 순간들이 나를 덮쳐도 너는 조용히 내 곁을 지켜 줬지. 샴푸야, 너와 함께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너 없이 견뎌야 한다는 게 나는 무서워.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너를 먼저 떠난 건 언제나 나였는데, 이기적이지? 그래도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굴자면, 혹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고 다음 생이라는 게 우리에게 또다시 주어진다면, 그때도 나의 가족이 되어줄래? 그때는 내가 너를 훨씬 더 많이 기다릴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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